어머니는 기억력이 좋았다.

15세때 가난한 농촌의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이후 15년동안 7남매를 낳았다.

막내인 나를 낳고 또 아이가 생겼는데 중절로 떼었다고 했다.

외갓집의 복잡한 집안사정은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안되었다.

그런대로 재산과 땅이 있는 집안이었던것 같은데 첫째할머니가 아들을 못낳아서 둘째할머니를 들이고, 둘째할머니도 딸만 셋, 그래서 또 셋째할머니를 들이고...

100년전에는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보다.

우리 할머니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세번째 할머니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세번째 할머니는 아들씨를 몇 개 갖고 있었던가 보다.

딸을 몇 낳다가 또 임신을 했을때 그 때가 가을 추수받이때였는데 새참을 이고 가는 것을 할아버지가 늦게 온다고 낫을 들고 이년 죽인다고 달려오자 굴러서 유산을 했다.

아들이었단다.

외삼촌이 한 분 계신다.

세번째 할머니에게서 난 곱디 고운 아들이다.

물론 할아버지댁의 전재산을 물려받았다.

할머니 세 분까지...

어릴때 시골의 고향은 30여 가구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모두 일가친척이었다.

국민학교 일학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친척들도 대부분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제사때가 되면 우리집에는 40-5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아버지가 장남이었는데 부산에 사는 6촌이내에서는 제일 항렬이 높았으므로 일년에 몇 번 있는 제사때마다 모두 우리집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명절때가 되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줄줄이 방문을 했다.

그 때마다 이모집의 누구누구 하고 소개를 하지만 한 번 거부반응을 일으킨 외갓집의 족보는 어른이 되어도 전혀 나아지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기억력은 숫자에 강했다.

모든 제사를 대부분 혼자서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누구의 제사에는 몇 사람이 오고 음식장만을 얼마나 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고 있었다.

우리 7남매의 생일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미역국이 올라 왔으며, 형제들이 태어날때의 시간이나 당시의 상황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새벽, 동이 트기 직전, 아직 어슴프레한 기운이 남아 있고 조금씩 동녘하늘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릴때 이 말을 듣고 하루를 열어가는 시간대에 태어났으니 적어도 100명중에 5등안에는 들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기뻐했었다.

고등학생때 조금씩 사회의 지식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나는 내가 태어난 시간을 자랑할수가 없었다.

범은 야행성동물이라서 밤중에는 설치지만 새벽에는 꼬리를 내리고 동굴로 들어가서 쉰다는 것이 아닌가?

여자라면 괜찮은데 남자는 활동중지에 해당하는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범이 범시간에 태어났는데 이런 홀대를 받아야 하다니...

그 이후로 나는 사주대로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때 가방을 잃어버리고 큰 좌절을 한 번 겪고, 3학년때 예비고사 성적표를 잃어버리고는 그만 다운되고 말았다.

어머니에게서 세째누나의 이야기를 들은 때가 그 즈음이었다.

태종임금의 모사였던 하륜대감이 우리 1대 할아버지의 삼촌이었는지 사촌이었는지 아무튼 그 근방이었으므로 큰 형이 공부를 잘한것이 직계쪽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수리쪽으로 강한것을 보면 어머니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세째누나는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에 7남매가 버글대는데 위에서 세번째 딸이 중학교에 진학할 여유라고는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있는 고모집의 공장으로 보내기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누나는 중학교에 못가도 좋으니까 여한없게 입학시험만이라도 치르고 싶다고 했단다.

결과는 수석.

2등이었던 옆집의 조카뻘과는 점수차가 20점이 넘었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미련없이 공장길을 가기 시작했다.

못난 아랫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누나가 참으로 가여웠다.

얼굴도 제일 예쁜 누나였다.

셋째딸이었으니까...

작은 형은 중국요리점을 한다.

그것도 나이가 들어서 늦게 배운 요리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런저런 일을 해도 항상 결과가 신통찮은 작은형을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둘째 누나쪽의 조카 결혼식때 한국으로 초대를 받았다.

집안의 대소사에 거의 참석도 못하고 있었는데 비행기 티켓값을 준다고 해서 무리해서 시간을 내었다.

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모댁 사촌형님이 나를 오랜만에 만났다고 송도해수욕장의 횟집으로 끌고갔다.

같은 할머니에게서 난 세 딸은 각각 8남매, 7남매, 7남매를 낳았고, 어릴때는 사천에서 고성까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서 가끔 왕래도 했으므로 잘알고 있었다.

식장의 부페식당에 일본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횟거리가 있길래 밥도 안먹고 회만 먹고 나왔는데 또 광어회가 한상 차려져 나왔다.

사촌형님은 너무나 오랜만에 나와 작은형을 만나는지라 아주 즐거워하면서 오늘은 밤새도록 우리를 놓아줄것 같지가 않았다.

식사후에 또 노래방이나 또 그런 살롱이나 데리고 갈 눈치였다.

나는 시간도 있었고 또 무리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이런 저런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작은형이 가게 일이 있고 내일 준비도 해야 하므로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아직 해가 중천인 오후 네 시였다.

사촌형님은 못놓아준다고 억지로 우리들을 데리고 가고자 했으나 작은형이 단호하게 거절을 해서 겨우 택시에 태워 보냈다.

울산까지 제법 요금이 나왔을 것이다.

나는 작은형의 분명하게 선을 긋는 태도를 보고 적이 안심했다.

이제까지 내가 보고 있었던 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은형과 함께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형은 그림을 잘그렸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펜글씨와 함께 그림도 일품이었다.

스무살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사진을 보고 연습장에 펜으로 영정을 남겼는데 아련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던 그 모습은 오랫동안 감동으로 남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으니까 작은형은 아홉살이나 열살쯤이었을 것이다.

마을에는 같은 또래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작은형은 싸움을 제일 잘했다.

어느 날 마을의 한가운데쯤에 있는 집앞을 지나가는데 작은형의 친구인 아이들이 서너명 뛰쳐나왔다.

모두 손에 장작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그 중 한 아이는 자전거체인을 쥐고 있었다.

한 아이가 소리치자 모두 한꺼번에 작은형에게 덤벼들었다.

머리박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나는 무서워서 울고만 있었다.

소란에 어른들이 뛰쳐나와 싸움을 말렸으나 작은형은 그 때 사건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것 같았다.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배신을 당한 것이다.

뭔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 일년 뒤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이사를 갈때도 작은형은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며 혼자서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국민학교 4학년때였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할수없이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시골에서 지내게 했다.

외할머니는 작은형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쩌면 세째누나보다도 작은형이 더 아까운 재주를 썩였는지 모른다.

그 때 작은형을 공격했던 친척형들은 한 명은 카톨릭사제로, 또 한 명은 기계공장의 사장으로.. 잘나가고 있다.

아들이 셋이나 있지만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혼자 생활하고 있다.

지난번 내가 방문했을때 누나들에게서 받은 돈을 몰래 내게 건네주신다.

사양할려고 하다가 그냥 받았다.

그게 어머니에게는 마음이 편할것이라고 생각했다.

홀로 외국에 나가 살면서 명절이나 조카들의 결혼식에도 참가하지 못하는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많이 안쓰러워 보일것이다.

바로 옆에서 칠순이 된 큰누나가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큰누나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나왔는데 시댁에서 사주를 본 결과가 은잔에 맑은 술이 가득한 형상이었다고 해서 당시 대학다니던 자형을 방학중에 불러서 결혼을 시켰다.

누나는 학력은 없지만 친구들중에서는 제일 시집을 잘갔다는 말을 듣는다.

큰누나는 지금 통신대학인지 노인대학인지에 다니는데 자형에게 당신이 대학교수되고 한게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고 다 내덕인줄 알라고하자 자형은 하이고 고맙습니다하고 대답했다나.

큰 놈이 대학에 들어갔다.

맨날 놀면서도 어떻게 공부는 했는지 중부지방에서는 명문인 대학에 입학했다.

40분동안 자전거를 저어서 역까지 가서 전철로 한 시간, 그리고 또 지하철로 갈아타고 10분, 통학하는데 두 시간이 더 걸린다.

그 놈이 3학년이 되자 지쳤는지 학교도 안가고 집에서 놀고만 있다.

관료사회인 일본에서 졸업하면 좋은 직장 들어갈것이라고 주위로부터 부러움받고 있었는데 이젠 내 정년후의 생활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한국 들어가서 아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머니 가실때까지 함께 지낼려고 생각했는데 퇴직금 한 푼 없는 회사에 연금도 해당이 안된다.

어느것 하나 부모님을 넘어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