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여름이 오면

어린시절의 기억은 여름방학이라면 시골의 원두막과 수박먹는 그림이었다.

원두막은 언제나 시원했고 수박은 달고 맛있었다.

일본직장인들의 여름방학인 8월휴가가 8일 토요일부터 9일간 이어졌다.

우리회사는 대기업에 매달려있는 관계로 연휴만 되면 바빠진다.

연휴끝나자마자 납품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몫은 내게로 돌아왔다.

덕분에 연휴의 반을 아무도 없는 넓은 공장에 홀로 출근해야 했다.

몇 년 전에 우리부서로 내정되었던 대졸자 두 명이 프레스공장으로 이전되고, 작년 4월에 새로 고졸자 두 명을 채용했다.

회사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로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위해 해마다 다섯명이상 채용해 온 학교이다.

우리 부서에 들어온 두 명은 둘다 누나들이 5년전에 입사해서 작년에 결혼과 함께 회사를 퇴직한 상태로 잘아는 여직원들이었으므로 친근감이 갔다.

그 중 한 명은 학생회장을 했으므로 젊은 후계자인 상무이사가 상당히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내가 속한 금형부는 기계가공인 NC반과 조립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고참부서원들은 서로 빠릿빠릿한 젊은 애를 자기반으로 넣을려고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NC반은 가공프로그램을 만들려면 CAD/CAM을 다룰수 있어야 하므로 조금 해골이 돌아가는 인재를 필요로 한다.

겉보기에 시마노군이 안경도 쓰고 영리하게 보여서 NC반 감이라고 모두들 잠정결론을 내려 놓았다.

입사 한달만에 결론이 났다.

아니, 한 달도 안걸렸다.

학생회장을 한 나카무라군은 태도도 싹싹하고 습득하는 것도 빨랐으나 시마노군은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도대체가 일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석달동안 기본을 가르쳤던 퇴역 반장의 말이다.

기계조작도 가르치면 5분후에는 모두 잊어버렸다.

울트라맨급이었다.(울트라맨은 지구에 머물수 있는 시간이 3분밖에 안된다)

입사초기부터 학생회장을 했다는 녀석과 비교되어 주눅이 들어있던데다가 내성적인 성격이 한 몫을 했을것이다.

결국 시마노군은 기계조작 버턴 한 번 눌러보지 못한채 넉달후에 유형지와 같은 프레스공장으로 옮겨 갔다.

홀로 남은 나카무라군은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상 이야기 끝...이면 좋겠는데..

귀여움은 올 3월달에 결혼한 새신랑 히로가 여전히 귀여운 짓을 하고 있어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년 8월, 5축가공 새기계를 들임과 동시에 사장과 후계자 상무이사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나카무라군은 NC반의 새유망주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NC반 반장과 둘이서 2주일동안 기계메이커인 MAZAK본사가 마련해준 호텔에서 호화생활을 하면서 최신식설비가 설치된 강의실에서 아름다운 여강사의 설명을 듣는 호사를 누렸다.

결과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학습이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마치 해골을 포맷해버린것 같았다.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강의 내용을 찍은 사진이 2주 동안 틀림없이 강의를 받았다는것을 증명했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여강사의 모습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젊은 상무이사의 기대가 너무 이상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원래 5축가공은 3축을 완전히 소화한 사람이 겨우 이해할까 말까한 수준이다.

3축가공을 완전히 이해하는데만도 6개월이상 걸린다.

그런 것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입에게 의욕만 믿고 맡겼으니...

5축가공기를 들이기로 결정되었을때 염치불구하고 회사를 위해서 나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일이 바빠서 내가 일주일이상 자리를 비울수 없다는 이유로 기각당했다.

실상은 젊은 사람을 키우고 싶다는 것과 또 한사람에게 기계가공 전반을 맡기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외국인인데다가 정년퇴직이 멀지 않았다는 심리적 요인도 작용했을것이다.

두 달 가까이 5축기계의 전원만 넣었다 껏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나카무라군을 맡아서 3축부터 가르치게 되었다.

최첨단인 5축가공기는 1년동안 간단한 3축가공만 몇 번 했을뿐 제능력을 발휘하지 못한채 손님이 올 때 소개하는 얼굴마담이 되어 버렸고, 나카무라군은 부서원에게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굳은 일을 도맡아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원래 이런 일은 능력이나 의욕보다는 적성이다.

CAM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재미가 있어야 하고 또 강력한 절삭날이 연약한 철강재료를 사각사각 깎아가는 것에 희열을 느껴야 제대로 된 NC용 대갈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편, 프레스로 귀양간 시마노군은 같이 입사한 동기생 여직원들과 함께 제세상을 만난듯 신나게 일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연휴직전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하찮은 일로 반장에게 꾸지람을 들은 나카무라군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회사를 나섰고 급기야 집에 가서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아기 엄마가 곧 바로 회사로 전화를 했고 모두 퇴근한 가운데 늦게까지 남아 있던 여직원이 애꿎은 화풀이를 당해야 했다.

사실, 반장의 싸이코적인 꾸지람은 어떻게 이런 인간이 반장이 되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나카무라군의 부친과 친구인 옆부서의 과장은 나카무라군이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까 내게 상담을 해왔다.

나로선 오히려 싸이코반장이 그만두었으면 했지만....

연휴도 반이 지나서 늦은 귀향을 했다.

그래도 오봉날짜에는 맞출수가 있었다.

8월14일이 성묘날이다.

올해초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첫오봉이므로 흩어져 있던 네자매가 모두 모였다.

안방에 차려진 제단에는 평소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치장을 했다.

우리나라 제사때처럼 제단을 차리는 양식이 있는가보였다.

홍동백서, 어동육서, 좌포우혜, 또 뭐더라등...

밤이 늦었는데도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매들이 다과를 들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일 윗 처형은 눈을 반쯤 감은채로 차를 따르며 손님접대를 하고 있다.

밤 한시가 훨씬 지났다.

처갓집에 올 때마다 목격하는 광경이지만 처형은 항상 거실을 지키고 있었다.

새벽 두시에 화장실이 마려워서 어둠속을 조심스럽게 걸어나올때도 거실의 불은 항상 켜져 있었고 처형은 손에 뜨게질감이나 뭔가를 잡은채 코타츠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새벽 다섯시가 되면 어김없이 양식장으로 나갔다.

지진때 자원봉사를 온 볼란티어의 숙박지. 지원금은 일절없고 전부 자비로 몇개월씩 봉사활동을 했다. なにわ(나니와)번호는 오사카시내의 차량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북쪽으로 100킬로 떨어진 이곳 미야기현도 양식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해류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고 1년후부터 양식이 재개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수는 그대로 동쪽으로 흘러서 태평양으로 빠져나가고 미야기현에는 혹카이도쪽에서 남하하는 해류가 흘러오므로 연안바닷가는 오염이 안되었다는 것이었다.

훈련 잘된 일본인들인지라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되기 때문이다.

처갓집 바로 아래의 시오가마(塩釜)지방에서는 굴양식이 성행했었다.

이 역시 양식이 한동안 중단되었지만 연예인들이 방문해서 시식을 하면서 안전성을 선전하고 지금은 정부의 철저한 방사능검사를 거쳐서 일본 전국으로 출하된다.

그래도 수천명이 사망하고 행방불명자가 수백명을 웃도는 바닷가에서 양식한 수산물을 타지역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이른감이 든다.

해마다 낚싯대를 들고 향하던 바닷가는 한산했다.

바다는 정돈되어 물도 깨끗해졌고 파도치는 바다는 예전과 변함없지만 낚시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보트를 타고 태평양쪽으로 나가서 수심 50미터의 낚시포인트에서 릴을 내릴때의 기분은 이젠 맛보기 힘들것 같다.

연안에서 양식하는 가리비조개나 미역등 수산물은 괜찮지만 먼 바다까지 이동하는 물고기는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믿어야 할지 의구심이 끝이 없지만 저녁식사때는 차려진 횟거리를 맛있게 먹었다.

다들 그렇게 생활하고 있으니까.

거친 모래사장이 있던 해수욕장에는 차에 탄채 식사를 하며 관망하는 가족이 몇 있을뿐 비키니모습은 없다.

바로 옆 항만은 어느 어리석은 대학교수가 주장한대로 높이 20미터의 둑을 쌓느라고 흙을 가득 실어다 놓았다.

1000년에 한 번 꼴로 발생한다는 미야기지진(동일본 지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연안 전부에 20미터 높이의 축대를 쌓자고 주장한 논문이다.

마을전체가 1미터 가까이 함몰되어 앞으로 몇십년간은 건축허가를 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공사를 하는 이유는 지역주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함일 뿐인것이다.

저녁때 손윗 동서들과 한 잔 한 것이 한밤중에 화장실을 부른다.

처갓집화장실은 재래식인데다가 건물 바깥에 있어서 되도록 밤중에는 피할려고 노력했지만 맥주를 서너캔 마시면 어쩔수 없이 감당해야 한다.

화장실은 재래식인데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전부터 참 신기하게 생각한 이유이다.

빵집에 가면 빵냄새가 나고 떡집에 가면 떡냄새가 나듯이 떵간에 가면 떵냄새가 나야 정상인데 여긴 냄새가 없다.

아래를 들여다보면 빨간 손도 있고...으.. 덜덜...

목조건물로 2층이지만 통나무를 가로질러 얹은 서까래와 기둥은 진도7의 지진을 용케 견디어 냈다.

비록 통나무가 갈라지고 한 쪽 문이 비틀어져서 안열리긴 하지만 우물도 화장실도 새지 않고 보수없이 그대로 사용중이다.

만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가고 그 중 천 명 가까이는 소식도 모르는채 4년이 지난 오늘,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에서 생활을 찾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로이 양식을 하고 가끔은 고둥이나 소라를 채취하여 멀리 나가 있는 딸네집에 보내면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