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중사 개정 본.

프롤로그.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 주인 얼굴도 못 보고 돌아서려니

허덕거리고 올라온 산길이 너무 멀고 길어져 은근히 화가 솟구쳐 오른다.

새로 배우기 시작한 징 잡이를 하는 주말에 농악모임이 아니면

좀체 집을 비우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가면 있을 것이다.
무조건 믿었던 추정에서 생겨난 창대했던 내 확신은

현실 앞에선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미약하게 사라졌다.

2~3일전에 미리 전화하고 가겠다했던 내 실없는 약속도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함께 따라갔다.


함께 마시려고 들고 왔던 술 한 병을 문 앞에 두고

돌아갈 길을 보며 크게 심호흡 한 번을 해본다.

마중 받고 배웅 받으며 오고갈 때는 수려한 주위경관과 수다에

깊게 묻혀 잘 보이지도 않았던 산길을 도는 가파른 언덕과

곳곳에 박힌 나무 등걸로 만든 계단들이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급히 오르내리기에는 그리 녹녹한 높이와 경사가 결코 아니었단 걸

새삼 느꼈기도 하지만, 설상의 가상이다.

.
산길을 오르며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이미 계단과

산 언덕길을 두텁게 덮어가고 있었다.

지금 내 스스로 위안을 할 수 있는 건 작은 아이들도 들고 다니는 핸드폰을

고집스럽게 아직도 장만하지 않는 친구에 대한 원망뿐이다.

항공사에 취업을 하면서 고향을 떠나 몇 십 년이 넘게 둥지를 틀고 살던

부산을 느닷없이 떠나서 서울 성북동 산기슭에 자리를 옮겨 왔을 때,

그가 원했던 것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세상 밖으로 빼 곰 겨우 문을 열고 불알친구인 내게 연락을 하기까지

1년이 넘도록 그는 죽은 듯이 살았었다.

장삼이사처럼 평범하게 살던 친구가 죽은 사람 흉내를 내며

고통스럽게 살게 했던 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살아온 시간동안

그가 가장 사랑했고 그를 가장 사랑해 주었다던 그의 아내 때문이다.

자신의 반쪽처럼 함께 살던 부인이 자궁암으로 세상을 등지자
그는 함께 따라 죽지 못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했었다.
자식 생산이 없던 그들 부부는 내가 알 수없는 강하고
끈끈한 유대감으로서로를 꽁꽁 묶어가며 살았을 것이다.


엉뚱하게 덕을 본 사람도 있다.

부모 한 세트를 덤으로 받고 나온 행운아라고 아들놈이

지금도 가끔 꿈 깬 사람 헛소리 하듯 자랑을 해대곤 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먼 거리를 마다않고 친구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그들 부부는 내 큰 아들의 백일이며 돌날.
유치원 입학 날 등을 시작으로 군 부대 면회까지 꼼꼼히 챙기며 살았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제 자식 보듯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자식이라는 인연 줄 하나가 더 있어서 넌 참 좋겠다.

참! 부럽다.

그랬던 친구가 가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인연 줄이 끊겼다.

또 코끝이 찡해온다.

하지만 여보게 자네가 가진 인연 줄은 또 있었다네.

친구라는 인연 줄 말일세.

그나마 산길에서 설렁설렁 내리던 눈은 버스 종점을 조금 지나쳐

산길로 가는 쪽에 여벌로 나가있는 포장길에 발을 디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정을 접고 퍼붓기 시작했다.

머리와 몸에 매달린 눈을 털어내고 버스 발판에다 발을 털어대다

몸을 돌려 버스가 갈 길을 먼저 헤집고 길을 다시 잡았다.

사람도 못 만나고 술병은 두고 왔지요 눈은 퍼붓듯 오지요.

귀도 손도 시립지요.

이보다 더한 술 마실 적절한 이유는 자주 만날 수 없다.

친구가 이사 하던 날 함께 마셨던 쌍 다리 집이라는 돼지 갈비 집

간판이 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눈길 속을 휘적휘적 걸어 내려갔다
.

평일이라도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 붐빌 시간은 이미 지났고,

점심 손님을 받기에는 이른 시각인데다 눈 까지 퍼부어대는

산 초입에 갈비 집은 불기도 사람기운도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어정쩡한 시간에 밥도 아닌 술을 청하고 혼자 왔는데

술잔을 두 개나 달라는 내가 별나 보였는지 주인이 뒤돌아 가다

흘깃 다시 보는 기척을 남기고 만다.

술이 고팠다.

얼었던 몸이 풀려가자 술 벌레들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갈비가 오기 전 마늘과 양파를 안주삼아 맞은편에 오지 못한

친구의 술잔을 따라놓고 재빨리 내 잔에 술을 붓고

목 안으로 한잔을 잽싸게 털어 넣는다.

첫 잔이 목을 타고 흐르며 단 맛을 진하게 남긴다.

그리고 동반한 짜릿함이 온 몸으로 쫘 악 퍼져나간다.

그 쾌감이 사라지고 잊혀 지기 전에 연거푸 석 잔을 바삐 넘긴다.

편안한 아늑함이 서서히 밀려와 저절로 쭈욱 다리가 뻗어진다.

늙은 사람이 실연을 당했나.

연탄에 갈비를 올리며 주인이 또 흘깃거린다.

모양새가 속마음으로 끌끌거리며 혀를 차는 소리를 감추고 있다.

술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이 식당에 다시 오고 싶었던 이유는

또 하나 따로 있었다.

40년 전 군대생활을 하던 원주에도 같은 이름의 식당이 하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집 다 돼지갈비를 주로 구워 파는 식당인데다

둥그런 함석 탁자와 연탄불위에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갈비 냄새와

별 장식 없는 실내장식이 영판 원주 쌍 다리 집과 너무도 닮아있다.

내가 와 있는 줄도 모르는 친구가 이 눈길을 뚫고 나를 찾아 올리는

만분에 일도 확률은 없다.

그런데도 나는 홀로 마시는 이 술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너무도 빨리 많이 생겨난다.

양념이 타들어가며 진한 냄새를 풍기며 이제 막 익어가는

구운 갈비 냄새의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은 눈도 발길을 잡고 한 몫을 거들고 나선 터다.

의자를 밀어내고 바삐 돌아기엔 아쉬움이 너무 크게 자라나며 다가왔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 생성은 추억과 절묘하게 맞 닿아있는

연탄불에 지글거리는 갈비냄새와 퍼붓듯 쏟아지는 눈이 몰고 온

회억(回憶)에 대한 내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

김 중사 개정 본을 올리며.

오로가 마련해준 해우소를 비워 둔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김 중사를 나도 작가에 올리기 시작한 날로 치면

5년이 넘어 6년을 바라보며 훌쩍 지나와 있는 세월이다.

모처럼 다니러 왔던, 해우소에 먼지를 털어내다

새 얼굴 따라 울기님과 돌 잠님의 글에 발이 묶였는지도 모르지만

벽에 걸린 김 중사를 다시 다듬고 싶어졌다.

값이 크다 할 수 없는 글이긴 하지만,

처음 썼던 긴 호흡의 글이라 너무 엉성함이 마음에 걸렸었다.

오자,탈자며, 잘 이어지지 않았던 문맥과 부족한 곳을

채울 때 까지 잠시 머물다 가기로 했다.

아직도 건필을 간직한 팔공선달님과 .육묘법문님이 반갑고,

동 시절에 글을 올리던 소라네 님, 홍 선비님, 지니그니 님등의,

지금은 지면에서 만날 수 없는 글들이 그리워진다.

一圓 을 기억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일일이

새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큰 결례를

바다 같은 넓은 마음에 기대어 해량하시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