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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지가 다시 왔다. 

  ‘좋은 아침이군. 나와 줘서 고맙네.’

  나는 감시당하는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센트럴파크

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모바일 폰의 메시지 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그는

모바일 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속도가 빨랐다. 그가 다음 메시지를 보낼 생

각이었다면 이미 도착했을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가 이야기했던 벤치를

찾기시작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호수의 동쪽 산책로엔 센트럴파크가 보유하고 있다는 2

천여 개의 벤치가 다 몰려 있는 듯했다. 나는 길 위에 두 개의 벤치만 놓여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조깅코스로 이용하는 산책로보다는 오솔길

같은 게 있는 곳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산책로 옆으로 보이는 숲을 돌아보았다. 숲 안쪽은 어둑했고 인적이 없었

다. 그곳에 오솔길이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

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로막고 있는 것도 없었다. 

  나는 센트럴파크 동쪽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

너머로 맨해튼의 빌딩들이 보이는지 확인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어퍼 이스트사

이드의 스카이라인이 보였다. 나는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야행성 짐승처럼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을 줄 알았던 숲 속에도 아침은 찾아와 있었다. 기대했던

오솔길도 있었다. 나는 북쪽으로 가야할지 남쪽으로 가야할지 선택하기 위해 좌우

를 돌아보았다. 북쪽에는 길 외에는 눈에 띄는 게 없었으나 남쪽에는 무언가 보였

다. 

  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 보이는 물체는 벤치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두 개인 것

도 같았다.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의 위치에선 숲 밖으로 뮤지엄 마일

거리의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 아래 벤치가 있는 곳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벤치는 두 개였다. 나는 3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벤치 중 가까운 쪽의

것을 선택해서 다가갔다. 그런데 앉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숲 밖으로 거리

가 보이는 곳이어야 했다. 나는 카드의 무늬를 확인하는 갬블러처럼 왼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거기엔 며칠 전의 폭풍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들이 십여 그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내다보이는 거리엔 뮤지엄 마일의 명소 중 하나인 유대인 박물

관이 연극무대처럼 놓여 있었다. 

  유대인 박물관은 도시 구획의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은 주변 건물들에 비

해 절반 정도 크기인 5층 건물이었으나 외관의 아름다움은 가장 뛰어났다. 군청색

의 가파른 지붕 전체를 둘러싼 뾰족한 기둥들은 왕관을 연상케 하는 고풍미가 있

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각 층마다에는 부드러운 경계석이 있었고, 같은 방

식으로 둘레를 치장한 창문들은 모양이 제각각 달랐다. 

  센트럴파크의 높지 않은 담장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차량만 가끔 지날 뿐 행인

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건너편에 보이는 유대인 박물관 주변에도 인적은 드물었

다.

공원 쪽에서 내다보이는 유대인 박물관은 건물의 측면인 듯 문은 없고 창문만 보

였다. 박물관의 입구는 골목 쪽에 있는 듯했다. 따라서 그 건물이 유대인 박물관이

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건물 모퉁이에 설치된 현수막 외에는 없었다. 보

랏빛 바탕에 노랑 글씨로 ‘THE JEWISH MUSEUM’이라고 쓰인 현수막은 건물 2층

하단과 3층 상단에 설치된 봉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내가 목적지에 도달한 것을 확인하자 오히려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나의 의지로 이곳을 찾은 게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고, 나는 다시

메시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왼손에 든 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때마침 값싼 전자음이 울리면서 메시지가 다시

도착하고 있었다.

  ‘초조해 보이는 걸 보니 아직도 날 믿지 않나 보군.’ 
 
나는 쓴 웃음이 났다. 그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밤 새 시

카고에서부터 차를 몰아 맨해튼까지 와 있었다. 나는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내 구형 폰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만일 아무것도 확인

못한 채 폰이 꺼져버린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의 여행이 그런 식으

로 끝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센트럴파크도 죽기에는 괜찮은 장소지만,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저 어느 건물에서

긴 가방 속에 담겨 실려 나오는 게 내가 원하던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비록 구경

거리가 될 테지만 그게 좋았다. 껌을 씹으며 히죽거리는 부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 테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잠깐 사이 15분 정도가 흘러 시각은 일곱 시 오 분을 지나는 중이었다. 배터리의

잔량 표시는 이제 다 없어져 있었다. 나는 조급해져서 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고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베터리는 30분까지는 버텨줄 거야. 다음에 폰을 살 땐 LG 제품을 사게. 요즘 그

회사는 GM의 전기차 배터리를 전량 공급하고 있어. 배터리 제조 기술은 앞으로

LG가 리드를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디자인과 기능을 원한다면 다시 노키아 제

품으로 돌아가도 나쁘진 않아.’  
 
나는 약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직까지 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말만 믿고 시카고에서 이곳까지 차를 몰

고 오게 된 데에는 그가 그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한 약속이 바탕에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새로 사야 할 모바일 폰의 메이커를 추천하는 따위의 메시지를 보내온다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았다. 무언가 잘 못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속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난밤에 그는 우연히

호텔 창문에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지.

그는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더구나 나는 권총을 머

리에 댄 채 울먹이거나 오랜 동안 망설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가 호텔 창문으로

날 발견한 것이었다면 그렇게 빨리 메시지를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자살 방지를 실천하는 사회단체 같은 곳에서 자살자들에게 접근

하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좀 더 생

각해 보니 그 쪽이 더 가능성이 있었다. 노련한 호텔 카운터의 직원이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내었고, 나의 연락처를 그들의 리스트에 올렸을 수도 있었다. 그

리고 내가 그들의 메시지에 답신을 보내자 그들은 나를 긴급 처리 대상으로 분류

하고 집중 관리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지침서의 맨 윗줄에 쓰여 있는 내용이었

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여행을 하도록 유도했던 것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게 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그들의 연구 결과였을

게 분명했다. 
 
나는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등을 벤치 등받이에 기대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는 눈은 감지 않았으므로 동이 트고 있는 하늘

에 번지는 붉은 색이 꽤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계속 살고 싶다는 마

음은 들지 않았다. 지난 밤 동안 일어났던 일들과 주고받았던 메시지의 내용을 떠

올려보니 모든 게 확실해지고 있었다. 

  나는 폰을 바닥에 집어 던져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세웠다. 그리고 내 구형

폰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다시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었다. 
 
‘폰은 깨버려도 상관없지만, 가다와 인사를 꼭 나누도록 하게.’
 
나는 더 이상 그의 예지력이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오던 담당

자는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인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전문가 여럿이서 나에 대해 분

석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나의 사회 보장 번호와 성장 배경,

경력에 성격까지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행동을 예측

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빌어먹을 자식’ 하고 욕을 떠올린 뒤 성난 시선을 둘 곳을 찾다가 다시 하

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이 걷혀가는 하늘엔 나의 욕이 한 자 한 자 가서 박힌

다면 적당할 것 같아 보였다. 만일 그렇게라도 된다면 나의 분노는 가라앉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스카이라인 너머로 보이는 하늘엔 새

한 마리조차 날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였다. 소리는 내가 잠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만큼 작았다. 그렇지만 나의 방어본능은 거미줄의 진동

을 느끼는 거미처럼 반응하며 나를 깨우고 있었다. 

  지난 밤 사이 여덟 시간 동안 운전을 했던 나는 벤치에 앉은 채로 잠깐 잠이 들

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벤치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았다. 3미터 정

도 떨어져 있는 옆의 벤치에는 어느새 젊은 여자 한 명이 와 서 있었다. 
 
그녀는 종이 가방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무데도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따금 다른 손에 들고 있는 모바일 폰을 들여다보

며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가다’일까 궁금해졌지만 상관 안 하기로 했다. 다만 그녀가

나와 같은 자살 기도자라면 죽기에는 좀 어린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이

조금 넘을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아랍계의 전형적인 피부색과 생김새를 지

니고 있었다. ‘가다’라는 북아프리카 쪽에서 흔한 이름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와 한 번 눈이 마주친 뒤에는 다시 그녀의 행색을 살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셔츠와 바지가 나처럼 구겨져 있는 것과 얼굴이 초췌한 것은 이

미 보아 두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지난밤에 나와 같은 메시지를 받았던 것 같았

다. 그리고  그녀도 나처럼 ‘유대인 박물관’이 보이는 동쪽 숲의 벤치 근처로 오도

록 유도되었을 것이었다. 

  나는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들은 나와 그녀를 만나게 하면 모든 게 잘되어질

것이라 여기고, 자신들의 거짓말의 색깔이 흰 색이라고 믿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

지만 나는 정신과 치료의 성공률과 실패율이 반반이라는 조사를 신뢰하는 부류였

다. 더구나 알코올 중독자의 모임이나 우울증 환자들의 모임과 같은 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질색이었다.

  배터리가 다 되어 폰이 꺼지고 있었다. 표시 창에 보이는 ‘굿바이’라는 인사말은

삶으로부터 다시 발걸음을 옮겨 죽음으로 향하게 된 내 운명에게 건네는 마지막

메시지 같았다. 
 
폰이 켜질 때 장조 음계의 멜로디가 머리를 내밀던 것과는 달리, 단조 음계의 멜

로디가 꼬리를 감추며 폰이 꺼졌다. 그것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던 희망도 함께 꺼졌음을 의미했다. 

  나는 내 손때가 묻은 구형 폰을 벤치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일어섰다. 아

랍계 여자는 나의 움직임을 발견했는지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눈인사라

도 나누고 돌아서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크고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의 본능은 그녀가 씨를 뿌

릴만한 토양인지 아닌지 살피는 일에 게으름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내 타입은

아니지만 쓸모없는 토양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머릿속에 문

자화 되어 떠오르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볼륨감이 있는 여성을 선호하는데 그녀는 평범했으므로, 그와 같

은 복잡한 인식이 내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먼저 인사를 건넬 생각은 없는 가운데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타

인으로부터 전해져오는 그러한 느낌은 모든 게 귀찮아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곧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가 돌아선 사이 그녀의 등 뒤를 지나쳐갔다. 그리고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이 있는 남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갔을까. 그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 소리는

작았지만 듣지 못할 만큼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넸다. 

  “혹시 이름이 가다인가요? 맞군요. 그만 잊어버리고 집으로 가요. 그 자들한테 속

은 거예요. 우리끼리 만나서 대화를 해봤자 해결될 건 없어요. 안 그래요?”

  그녀는 눈동자를 몇 번 움직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절망하는 듯했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감지되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 일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

녀는 내 눈에 띄었을 때부터 밝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표정이 어두워

질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더 굳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향하는 발걸음의 끝에도 생명은 없을 테니까. 
 
무언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서 버려지

는 물처럼 내 안의 시커먼 구멍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녀로부터 돌아섰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눈과 코와 입의 특징을 기억에 담고 있었다. 그것은 혼자서 세

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허우적임 같은 것이었다. 비록 같이 가서 계획했던 일

을 함께 끝내버리자고 손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녀의 이미지만이라도

담아 갈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리고 근처의 호텔 방으로 가서 애초에 계획했던 대

로 방아쇠를 당겨버린다면 모든 게 순조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해가 떠올라 버렸으나 동반자가 있는 마당에 해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나 말고도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은 많았다. 자살의 러시까지는 못 되지만 최소한

한 명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반나절 동안 나를 속인 그들은 철저하

게 실패한 셈이었다. 

  나는 글루밍 선데이 멜로디가 호텔로 가는 동안 떠오르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

다. 그리고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믿기지 않는 말이 들

려왔다. 

  “당신은 그가 신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린 거군요.”

  거친 영어 발음이었다. 이제 그녀가 북아프리카 쪽의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난 여

자라는 짐작을 넘어 이집트 출신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R’ 발음을 그런 식

으로 굴리는 북아프리카 사람은 이집트인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랍어를 말함에

있어서도 리비아나 요르단과 같은 주변 나라 사람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다만 그녀의 이미지만 필요로 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 메

시지를 보내온 상대에 대해서 신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의 아들은 자살자의 영혼을 환영하지 않아. 비록 그들이 타인에게 해를 가하기

보다 스스로를 끝장내버릴 만큼 선하다고 해도 말이야.’

  그랬다. 그 글을 보았을 때 나는 깊은 직관력을 느꼈고, 신이 내게 다가와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신이 다가와 줄 것이라면 다른 방식

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자리 잡았다. 환상이 보인다거나 천사가 나타

나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사건이 신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선 더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문자 메시지라니. 만일 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

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그 자체로 신성모독일 게 분명했다. 

  “이봐요. 아가씨. 그가 신이 아닌 게 아니라, 신 같은 건 없어요. 그만 집으로 가

요. 그리고.......” 

  나는 아까 그녀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한 마디 말로 만회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 쪽이라도 다시 힘을 내서....... 극복해 보도록 해요.” 

  나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필요는 없

었다.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어버렸으니 소모적인 동정을 교환하느라 또 다시 아

까운 시간만 흘려보내게 될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미 열 시간 가까이 허비하고 있

었다. 하지만 ‘그 쪽이라도 다시 힘을 내서’ 하며 불필요한 말을 꺼낸 건 금세 후회

했다. 그건 상대를 위한 말이기보다는, 내 쪽에선 이미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는 생각을 내비치는 말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느끼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폰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지

닌 신형 기종은 메시지 도착 음에도 멜로디가 있었다. 나는 달아나듯 걸음을 더 빨

리 걸었다. 그들의 스팸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외침은 내 걸음보다 빨랐다. 그리고 내 뒷덜미를 붙잡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당신 이름이 데이비드예요? 이걸 봐요. 당신에게 온 메시지예요.”

  나의 발걸음은 저절로 멈춰 섰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보지는 않는 일에 성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버릴지 아니면 그들이 가다라는 여자의 폰을 통해서 내

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이라도 확인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몇 초 후, 나는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그녀가 내게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소리는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열심히 걸으

면 다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앞에 보이는 숲 너머 어디선가 사람들의 웃는 소

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침내 속임수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로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어들이었다. 나의 발걸음을 잡아 세운 건 단어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소

리치는 내용 중 일부를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단어들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하자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메시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죠.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말예요. 소리가....... 다시 들려온 메

시지 소리가 음의 높낮이에 변화가 있었어요. 그리고 또 한 번....... 또 한 번.......

내가 난간에서 내려올 때까지,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그 소리가 약간씩 달라졌어

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건 마치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