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그곳을 한번 만이라도 더 가보아야 할 것 같아서 토요일 점심 무렵에 길을 나섰다.

그 집은 수표교 어림께에 있었는데, 철물점 밀집지역 뒷편 골목길에 있는 자그마한 기와집이었다.

점심시간도 끝나고, 아직 날 어둡기는 한참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밥집이 모여있는 그 골목길은 한산했다.

낮은 헛기침과 함께 그집 문을 밀고 들어 섰을 때, 전번에 보았던 참한 처녀아이가 나를 맞아 주었다.

정갈하게 치워진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려니 처녀 아이가 간단한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농익은 매실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었다.

“ 아주머니는 어델 가시고? “

“ 예, 오늘은 손님이 적은 날이라, 아침 일찍 절에 가셨습니다. “

“ 늦게나 오시려나? “

“ 아닙니다. 저녁시간 전에 오실 겁니다. “

처녀 아이는 부엌에서 잔일을 하는 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나는 봄나물이랑 해서 매실주를 자작하고…

그렇게 봄날 오후는 할일 없이 흘러 가고 있었다.

사 나흘 전에  오랫만에  만난 옛 친구와 점심이나 먹자고 무작정 들어선 이 집에서 느닷없이 그녀와 얼굴이 마주 쳤을 때, 그녀나 나나 모두 놀랐다.

차마 잊지는 않았지만 잊은듯 살아온 지난 이 십년의 공백이 삽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며 그저 가슴이 쿵쿵 뛸 뿐이었다.

기왕지사 잊은듯 살아온 사람…

그냥 스쳐 버리고... 모른척 남은 세월 살아 갈까…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내가 여기서 모른척 스쳐 간다면 너무나도 무심하고 떳떳치 못한 처사인 것 같아

며칠 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다가 이렇게 다시 찾아온 것이다.

매실주 한 주전자를 거의 비워 갈 무렵 밖에서 기척이 들려 왔다. 아마도 그녀가 돌아 온 모양이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 나이 몇인데 주책없이도 이리 가슴이 뛰는 것일까…

하며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자신을 꾸짖었다.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 와서는 주안상 앞에 옆 얼굴을 보이며 비스듬이 나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나갔던 차림 그대로 인듯 시원해 보이는 한복차림이었으며, 손수건으로 콧등에 송글 송글 맺힌  땀방울을 찍어 내고 있었다.

“ 다시 오셨군요, 그리 안 하시어도 되는데…”

“ 글쎄… 그리 안 하려 해도 그리 되더구먼…”

나는 주전자를 기울여 반 잔쯤 남아 있던 매실주를 알뜰히 따라서 한 모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 정아야, 술 좀 더 가지고 오너라,”

그녀가 여닫이를 조금 열어 보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분부를 하자 곧 처녀 아이가 쟁반에 술 주전자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 작년 이맘때 담근 술인데, 잘 익었어요. “

그녀는 살프시 웃으며 나에게 술을 한잔 따랐다.

“ 흠, 맛이 잘 들었구먼…”

나는 한숨에 들이키고는 할일 없는 사람인양 애매한 봄나물만 한 젓가락 듬뿍 집어서 우적우적 씹었다.

“ 정아야, 너도 어른께 한잔 따라 드리거라…”

그녀는 새 주전자를 상 께에 놓고 나가려는 처녀아이를 불러 세웠다.

“ 네, “

처녀아이는 내가 들고 있는 잔에 다소곳이 술을 따랐다. 왠지 처녀아이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고 생각했다. 처녀아이는 술을 따른 후 고개를 숙인채 뒷걸음으로 조용히 방을 나갔다. 처녀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어쩐지 가슴에 비수가 박히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 딸인가? “

“ 예, 불쌍한 아이지요…버려져 세상을 원망하며 울고 있던 갓난애를 주워다 키웠지요. “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 왔던 봉투를 꺼내어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밀어 내 놓았다.

“ 받으오, 적지만 임자의 몫으로 늘 따로 간직하던 것이오. “

“ 받지 않겠어요.

그냥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 온 대로 ...  생각만 하며 살고 싶어요.  “

나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봉투를 다시 거두어 들였다.그리고 일어섰다.

“ 가겠오. 미안하오.”

“ 미안하단 말씀은 마세요...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초라해 져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술집에서 만나고… 또 술집에서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 딱 그거하나…

너무 원망스러워요…

당신을 만난 것 한번도 후회하지는 않으며 살아 왔지만…

그럼 안녕히....”

그 집을 나와 돌아가는 길은 왜 그리 발걸음이 무거웠던지.

계절이 바뀌고 한 삼 사 개월 지난 후에 나는 그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근처 부동산에서 물어보니 두 달 전에 집을 팔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 버렸단다.

그녀는 이십년전에 그랬던 것 처럼, 또다시 잠적한 것이다.

또다시 만나려면 ... 다시 이십년이 걸리려나...

가슴이 싸아 하니 아파왔다.

나는 그녀를 잘 안다는 부동산 주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어 보았다.

“ 그런데 그 처녀아이는 양녀였던가요? “

“ 아, 그 처녀…”

부동산 사람은 담배 한대를 처억 물고는 불을 붙여 연기를 푸우욱 뿜어 보이며 대답했다.

“ 왠걸요, 친딸이지요… 어려서 말썽도 피고 공부도 안하고 어머니 속을 썩이더니만 요즘 맘 잡고 엄마 일을 도와주었죠… 자기는 밥집 일을 하는 것이 적성에 맞다나요…그런데 왜 그렇게 황망하게 집을 처분했는지 모르겟단 말씀이야, 장사도 그런대로 잘 되었었는데…..허어,  “

 처녀아이가 나에게 술 한잔 따를 때 전해져 오던 파르르 떨림을 기억하며

나는 그만 눈시울이 젖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