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읽던 레미제라블 마지막 권을 도서관에 반납하고는 당분간 책을 빌리지 않기로 했다.
읽은 책의 여운을 얼마간 즐길 셈이었다.
읽을 책이 없자 심심해졌다.
인터넷 바둑을 두기 위하여 컴퓨터를 켜면서, 부팅을 기다리는 그 지루한 시간에 책상위에 놓여 져 있던 책을 뒤적였다.
친구가 저술한 위상수학 책이었다.
받아만 놓고는 보지 않던 책이었다.
나는 수학을 끊었다고 생각하면서 수학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이 수두룩한데 내가 왜 골치 아픈 수학책을 보겠는가?
젊었을 때에야 어느 정도 야망도 있고 하니까 수학을 연구했지만 이제는 뒷방으로 물러난 신세이다.
소설책을 보면 혹시나 늦게나마 작가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지만 수학을 연구한다고 나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 얄팍한 나의 계산속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리만가설을 해결하는 공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마음을 비우고 수학책을 봐서 그런지 그런대로 볼만했다.
아주 심심하거나 우울할 때 수학책을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빈 위장에 곡기가 채워지듯이 빈 머리에 하나씩 엄밀한 얼개가 채워져 갔다.
문제는 책의 뒤 부분에 있는 부록을 보면서 생겼다.
앞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해서 부록을 읽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엄밀한 증명이 없이 집합의 여러 정의와 정리가 나열되어있었다.
공집합 족에 대한 정리가 있었다.
공집합 족의 합집합은 공집합이며 교집합은 전체집합이라는 내용이었다.
엄밀함이 없이 내용만 나열되었기에 나도 그냥 초보적인 생각만으로 접근하였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합집합이 공집합이 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가는데 교집합이 어째서 전체집합이 되는가? 이거 뭐 이 정리에 우주의 심오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자의 도덕경에 해당하는 만큼의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그 정리에 대한 증명이 나와 있었다.
읽어보니 한 줄 한 줄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무언가 한 방에 이해가 되어야할 텐데 도무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답답해진 나는 50년 전 대학생 때 읽었던 실함수 책을 펴 보았다.
거기에 그 정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정리에 대한 증명대신에 짤막한 두 줄이 쓰여 있었다.
It follows from our definition that the union of an empty collection of sets is empty and that the intersection of the empty collection of sets is X.
증명이 필요 없이 정의에 의해서 한 방에 그냥 성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책의 위 부분에 있는 집합족의 합집합과 교집합에 대한 정의를 읽어보았다.
그 정의를 보자 정말로 한 방에 바로 정리가 이해가 되었다.
누렇게 색이 변질된 책의 그 부분에 아무런 낙서가 되어있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대학생 때도 그냥 한 방에 이해가 된 모양이었다.
이런 한심한!
초보적인 접근으로는 우주의 비밀이라도 된 양 거대했던 정리가 엄밀한 정의를 보는 순간에 그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런 단순한 정리를 가지고 며칠씩 끙끙댔던 나 자신이 더욱 한심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머릿속은 개운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