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벤

코베 바로 옆에 있는 효고현의 아카시(明石)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모리정기(森精機)라는 기계회사에서 일주일가량 조립현장을 도와주는 일인데, 이동하는데 너댓시간 걸리므로 하루정도 땡치고 좀 여유있게 출발했으면 좋으련만 오전근무를 마치고 딱 시간맞춰서 가라고 한다.

토요하시는 신칸센역은 있지만 특급열차는 그냥 통과하고 역마다 정차하는 고다마라는 완행만 서는 곳이다.

지역 국회의원들이 힘이 없으니 신칸센특급도 못세우고 바로 앞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도 더 작은 옆도시 토요카와에 빼앗겼다.

일찍 출발하는 줄 알고 점심도시락도 준비안한 상태라 열두시 반에 역구내로 들어가서 도시락을 골랐다.

오사카 이래 몇 년만의 도시락인지라 내심 기대를 했다.

오사카와 토쿄의 신칸센역에서 산 에키벤은 가격에 걸맞게 내용도 충실했기 때문에 나의 에키벤에 대한 이미지는 괜찮았다.

적어도 토요하시 에키벤을 맛보기전까지는...

일본말로「에키벤(駅弁)」이라 불리는 도시락은 종류가 다양하다.

전국의 역에서 판매하는데 일반적인 도시락외에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특징있는 도시락이 등장한다.

혹카이도의 오징어속에 찹쌀밥을 넣은 오징어도시락과 게맛살도시락.

이와테의 성게도시락.

군마현의 닭고기와 버섯등을 넣은 돌솥밥.

요코하마역에서 판매하는 슈마이도시락.

토야마의 숭어초밥.

기후현의 명물 히다 불고기도시락.

옆동네 시즈오카현의 우나기(장어)덮밥등등...

어찌 이리 잘 알고 계시냐고요?

다 인터넷에서 찾은거지요.머...험,험.

기대와는 달리 겨우 서너종류밖에 안되는 토요하시의 에키벤은 초라했다.

하긴 아이치현은 토요타자동차 본사가 있는 관계로 나고야를 비롯한 주변 도시는 모두 공업지대이다.

주변에 공장들이 많긴 하지만 이 곳 토요하시는 야채재배가 전국 2위가 아닌가?

식재료에서 전국 2위라는 기대감에 제일 비싼 900엔짜리 마쿠노우찌를 골랐다.

마쿠노우찌란 원래 에도시대의 신파극등에서 관객에게 판매하던 도시락인데 주먹밥대신에 조금 더 부식재료를 넣은 것을 말한다.

나고야에서 특급으로 갈아 타면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지만 좌석도 확보했고 그대로 앉아서 가기로 했다.

오차도 준비하고 덧붙여 맥주도 한 캔 따고 대망의 마쿠노우찌를 열었는데...

도시락의 반은 밥이었다.

또 밥의 반은 김으로 덮여 있었다.

부식쪽으로는...일본도시락의 감초 노란색단무 두 조각(식당이고 도시락이고 30년 가까이 살면서 두 조각 이상 주는곳 못봤음),검은 콩자반 다섯 개,노란색 계란말이 한 조각,붉은색 연어구이 한 토막,검은색 다시마를 조려서 리본처럼 묶은것 하나,흰색과 핑크색이 어울린 어묵 한 토막,흰색과 노란색의 삶은계란 반토막,카키색 돼지감자 한 알,차콜색의 시이타케버섯 한 조각,살색 비엔나 소시지 한 토막,그리고 노리끼리한 옷을 입은 새우튀김 하나가 전부였다.

제깐엔 먹음직스럽게 보일려고 이리저리 울긋불긋하게 보이도록 배치에 신경을 썼지만 첫눈에 보기에도 너무나 빈약했다.

오사카에서 본 기억은 분명히 이런것이 아니었다.

도시락이 아흔 아니,아홉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칸마다 색다른 주먹밥이 들어있는 그런 화려번쩍한것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계산을 해 보았다.

도시락 내부공간이 14*20이고 밥은 그 반인 7*10을차지하고,김 한 장의 크기는 그 반인3.5*5이지만 반찬으로서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밥을 아홉등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반찬배분을 했다.

컴퓨터가 고속회전을 시작했다.

단무가 제일 간이 맞으므로 두 조각이면 밥 두 등분은 처리할수 있다 ok.

계란말이 한 조각에 한 등분 ok,연어구이로 두 등분 ok,다시마조림이 한 등분,콩자반과 어묵으로 한 등분,돼지감자와 버섯,소시지로 한 등분...ok,ok,ok!!!이런!한 등분이 남네...

다시 계산을 했다.

밥을 열 두 등분으로 나누면 단무 3분의2조각으로 한 등분을 처리할 수 있고,단무 두 조각이면 밥 세 등분,계란말이가 밥 한 등분에3분의1이 남고...열 여덟등분으로 나누면콩자반 네개로 밥 한 등분 처리하면 콩 한 알이 낙동강오리알신세고...7분의 22등분으로나누면 답이 없고...

맥주로 알콜소독한 2비트 아이큐 두 자리 슈퍼컴퓨터가 초고속으로 돌면서 이리저리 계산한 결과 싫어하는 비엔나소시지와 콩 한 알쯤 어찌어찌 빼고 나머지없이 똑떨어지게 처리하는데 성공했다.

아마 소숫점이하 500만자리까지 갔을것이다.

쌀 한톨 콩자반하나 떨어뜨려서도 안되는 숫자였다.

조심스럽게 밥 한 등분을 집어서 먹고는 계란말이부터 공략을했다.

첫술에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반찬종류는 양도 질도 형편없는데다가 양념도 제대로 되어 있지않았다.

밥위에 덮여있는 김은 그냥 두툼한 생김이었다.

김을 먹는데만도 간장이 필요했다.

보통 도시락에 들어있는 생선모양의 플라스틱간장병도 잊었는지 들어있지 않았다.

폭주하는 컴을 간신히 달래고 오차에 말아서,맥주에 말아서 도시락을 먹었다.

삶은 계란과 어묵,소시지,새우튀김은 아예 간이 안되어 있었고,다른 반찬도 모두 싱거웠다.

게다가 또 왜 그렇게 달게 만들었는지...

집에서 김치와 된장찌개만 먹다가 일본의 시판도시락을 먹을려니 정말이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밥을 반의 반도 먹지 못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동료는 같은 도시락을 골랐는데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역시 일본인이다.

맨밥먹기대회를 하면 아마 일본인이 일등할거다.

물좋고 쌀좋은 일본에서 역전 도시락에 맛없는 아이치현의 쌀을 사용하다니...

토요하시역이여.

그래,내가 맛있게 밥짓는 방법을 알려줄께.

TV에서 본 거다.

하나,생쌀은 60%의 수분을 흡수하므로 처음 넣는 물은 미네럴수로 한다.

하나,쌀알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가볍게 두어번 저은 후 물을 버린다.

하나,물을 버린 상태에서 열 번정도 손으로 닦는다.

하나,뜨물을 깨끗이 따라 버린다.

하나,생수로 물을 맞추고 냉장실에 두시간 넣어둔다.

하나,밥을 짓는다.

하나,밥이 되면 주걱으로 저어서 김을 빼고 나무 밥통에 옮겨 놓는다.

하나,알것재?

옛날,먹을것이 없었던 시절의조상님들께는 죄송하기 그지 없지만 나는 미각이 좀발달한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맛없는 건 못먹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