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별 준비.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한 거지.

어떤 이가 그렇게 노래를 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주 가끔은 너무 힘들고 지쳐서

한발도 움직이기 싫은 그런 날에 발목이 묶여버린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때면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격려해 줄 때,

그 노래를 웅얼거리며 원동력으로 빌려다 쓰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딘가 비켜갈 길이 있음을 암시 받는 듯해서다.

하지만 산다는 것.

그것은, 때론

살아야 하는 이유의 붙어있는 의미들이 토막토막 끊겨 나가는

참담한 아픔을 제물로 바친 뒤에라야 길을 열어 주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돼지를 도살하며 맛있고 찰진 부위를 요리조리 도려내

갖가지 해괴한 이름표를 붙여 놓고 식도락(食道樂)을 즐기듯,

삶이 재미삼아 휘둘러댄 잔혹성의 시달려야 하는 숙명을

잊지 않도록 꼭 일깨워 주고 갔다.

안심, 등심, 알 등심, 등심 덧 살, 목심, 앞다리, 뒷 사태 살,

사태, 항정, 볼기, 설 깃, 도가니, 보섭, 홍두깨, 갈비 살,

마구리, 삼 겹, 갈매기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육,해,공, 3군을 통 털어 뽑아낸 우수 교관보다 더 상세하고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는 부위 별 쓰임새와 맛에 대한 강의를

천 일병이 멋지게 펄치고 있다.

너무도 해박한 지식이며 달변이다.

방대한 지식을 막힘없이 술술 쏟아내는 그의 입을 쳐다보며

포대 대원들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을마당에서 타작을 당하는 벼들도 그렇게 맞지는 않았을 꺼 다.

전입오던 첫날을 시작으로 이병을 달고 있는 6개월을

징글징글 정말 숱하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길은 기본이고 병(兵)이 숙지해야할

암기사항 중 천 일병이 처음부터 끝 까지 외울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완벽하고 철저하게 하나도 없다.

오죽 했으면 대대장 양 중령이 열흘 포상 휴가를 걸고

천 일병이 외우는 군인의 길을 듣고 싶어 했을까.

하지만 천 일병은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그랬던 천 일병이다.

이름도 모르던 각종 부위를 능숙하게 도려내 김 중사와

내게 맛을 보인 그 화려한 정형의 칼 솜씨는 강의에 곁들인 환상이었다,

송곳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

서울 마장동 축산시장에 고기 정형사였던 천 일병이

대대 연병장 위로 우뚝 솟아올라 탈바꿈을 한 그날은 추석이었다.

ROTC 출신으로 전포대장을 지내고 작년에 제대한

제주 사람 박 중위는 제대 후에도 포대 대원들을 자신의

친동생들처럼 살뜰히도 챙겼다.

영외에서 벌어지는 훈련이나 측정시기엔 어김없이

자신이 근무 할 때처럼 포반장과 사수들에게 흰 장갑을 보냈고

당시에는 귀했던 제주 감귤도 대원들이 고루 맛을 보도록

사과궤짝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그 박 중위가 대 기업에 취업이 결정된 자축 기념으로 보냈다는

돈육 값은 박 상사의 손을 거쳐 살아있는 한 마리의 돼지가 되어

부대로 들어왔고, 천 일병을 용(龍)으로 승천 시켰다.

영내에 도살 허락은 대대장에 총애를 받던 김 중사가 받아왔다.

추석이 지나고 12일이 지나면 나는 군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추석은 군대에서의 마지막 축제였다.

그날은 송편이 조식에 포함돼 나왔고 대대장이 포대 별로

특식으로 막걸리 한통씩을 지급했다.

천 일병이 섬세히 추려낸 특수부위 날고기들로 술이 거나해진

대부분의 장교 하사관들은 오전이 지나지 않아 대부분 퇴근했지만,

연병장에서 치룬 B포대와 막걸리 2말 내기에서 3골 중 2골을 넣은

C포대의 차범근인 김 중사는 오후 늦게까지 붙잡혀 있었다.

군인으로서 김 중사는 진정 최고의 에이스였다.

하지만 인간관계와 정서를 풍요롭게 해준다는 어릴 적 추억이

김 중사에게는 흐르는 구름과 같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일까.

사람끼리의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로서의 김 중사는,

늘 웃고는 있지만 어딘가 슬픔이 숨어있는 것 같은 얼굴처럼,

대인관계에는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몹시 서툴렀다.

좋고 싫고의 극단적인 가름, 과도한 승부근성, 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학의 습성 등은 어쩌면 김 중사를 존재하게 한

힘의 근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래선지 이상(理想)의 가치를

김 중사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생존보존이 우선된 그의 삶의 그런 것들은 사치로 치부 됐을 것이다.

그 때의 김 중사는 안착한 신 환경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태어난 고향이 통영의 바닷가 근처란 것 외에는 김 중사의

고향에 대한 정보는 눈물이 나게 미약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5살도 넘지 않아 세상을 떴다는

김 중사가 간직한 어머니와의 추억은 더욱 나를 슬프게 했다.

그나마 피붙이를 지켜주던 외조부를 10살에 여위고

외가 삼촌들로부터 고아원에 버려졌던 아픈 기억들만으로 점철된

사고무친의 세월을, 김 중사는 홀로 건너 왔다고 했다.

열여덟에 19살로 나이를 속여 하사관 학교에

지원 입대한 후에야 의.식.주. 걱정에서 벗어났다는

김 중사의 성장과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다.

작고 어린 사람이 쓰고 있기에 억지웃음이 새겨진

애늙은이의 탈은 너무 크고 무거운 것 이였다.

자식이 없던 인사계 박 상사와 부인에게서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부모의 정을, 느끼지 못해보던 형제라는 정은

내게서 찾아낸 듯한 김 중사는, 1년도 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자식처럼 동생처럼 박 상사와 내게

전우애를 훌쩍 뛰어 넘은 피붙이가 되어 다가와 있었다.

병영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모든 기억은 군복 속에 스며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일상은 언제나 훈련과 직결 되어 있지만,

군 생활이 기억 속에만 머물지 않고 세월을 뛰어 넘어서

어제도 오늘도 되 살아 나는 것은 그곳도 사람들이 모여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았던 또 하나의 세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른 퇴근해서 인사계님 집에 가서 저녁 먹어라.

사모님 기다리실라“

취기가 돌자 한 잔만, 한잔만, 더 하자며 어서 퇴근 하라는

내 재촉을 들은 척 만 척 미적거리던 김 중사를 저녁

식사시간이 다 되서야 간신히 내 보냈다.

창군 사상 처음으로 군부대 P.X로 납품을 시작한,

작은 병맥주 5병을 출, 퇴근용으로 갓 산 자전거 뒤에 매달아 주자,

“요거마저 마시고 가면 안 될까요?”

응석 부리듯 매달리던 김 중사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보며, 돌아보다 떠났다.

포단 언덕에서 사단 정문까지에 경사를 페달도 밟지 않고

양발을 뻗고 내달리며 뒷등으로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내무반에 돌아와 술김에 저녁도 거른 채 깊이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다급하게 나를 흔들어 깨운 불침번이 비상선을 타고 걸려온

전화를 받으라고 재촉한 시간은 기상시간을 얼마 앞둔 새벽 이였다.

전화는 생각지도 않은 박 상사에게서 걸려왔다

뜻밖에도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던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울음에 잔뜩 젖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 하사!

김 중사가 죽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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