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바둑의 성장과 쇠퇴 - 도시화와 매스미디어를 따라

오늘 한국의 바둑은 전환점에 서 있다.

스포츠로 돌아선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그 정체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다. 스포츠의 개념 확장에 많이 좌우되는 문제겠지만, 역시 기예(技藝)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벗어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조화로운 정체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그 의문의 해결은 둘째로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젊은 기사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기전 중심의 프로 세계에서 기전의 운영 방식은 지난 10년 크게 바뀌고 있으며 단위(段位)는 무의미하고 단체대항전 속에서 개인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판단과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지만 세상사 판단은 어렵다.

이러한 때 한국바둑의 역사를 한번쯤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분야든 역사 속에서의 자신을 확인할 때에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의미가 지금 어떻게 주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자성의 목소리는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울리고 있었다. 1996년 몇몇 기사들이 승단대회 무용론과 함께 대국료를 폐지하고 상금제를 주장했던 것이다. 1989년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 이래 한국의 프로바둑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장에 고무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미 바둑의 위기감을 토로하는 기사들도 있었던 것이다. 해결방안에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적지 않은 기사들이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위기의 하나는 기사들의 숫자가 적정 수를 넘어선 것이 분명했던 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당시 9단 13명을 비롯 기사들의 전체 수는 141명이었는데, 기전 활동 외에는 바둑으로 인한 경제 활동이 별로 없었던 대다수의 기사들에게, 기사들의 증가는 곧 대국료 수입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상금만을 본다면 이창호의 수입이 10억을 넘어서는 등 외면적으로는 계속해서 바둑계가 성장하는 듯이 보였다.

한국바둑의 성장과 쇠퇴는 지금 돌아보면 뚜렷하다. 시기적으로 바둑은 1997년 IMF 전후해서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그 이후 바둑은 쇠퇴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 원인은 도시화와 매스미디어라는 두 요인 때문인데, 크게 보면 그 요인에 바둑의 성장과 쇠퇴가 결부되어 있다. 도시화와 매스미디어, 두 요인은 한국 바둑의 성장을 이룬 요인이면서 동시에 쇠퇴의 요인이기도 하다.

60년대 이후 산업화를 따라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신문과 방송 등 매스미디어도 성장했는데, 바로 그 궤적을 따라 바둑도 성장했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도시화는 소외를 촉진한다. 개인이 세상의 주된 흐름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무의미하고 고독한 감정이 소외감.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그런 감정 온다. 소외는 개인을 힘들게 하기에 극복되어야 하는 것.

무엇으로 보상했을까?

대화와 지근(至近)거리의 만남이 60년대 이후의 방식 중 하나였다. 너와 내가 만나서 너와 내가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 무엇으로 만나고 대화했을까? 손과 발, 입으로 했다.

무엇이 도와주었나? 무엇이 대화를 도와주었나? 바둑과 가까운 것만 꼽는다면, 다방과 술집, 기원 등이 노동의 일자리에 덧붙여 제공되었다. 그들이 도와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둑은 만남의 수단이자 목적이 되었다.

60년대 이후 80년대 중엽까지 다방과 기원이 그 언제나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만 보아도 바둑이 만남과 대화의 중요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랬다. 바둑만큼 지근거리의 만남을 이해하고 편하게 만들어준 것은 없었다.

왜 바둑이었느냐?

권투도 레슬링도 한때는 국민의 오락이었지만, 그러나 그 스포츠는 개인이 직접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둑은 직접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손으로 입으로. 대화와 지근거리의 만남에 필수적인.

바둑은 대중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신문이 있었다.

신문은 바둑과 잘 맞았다. 바둑의 흑백 선명한 그림은 신문의 가시성(可視性) 요구와 잘 맞았다. 글자만의 답답한 지상(誌上)을 바둑은 사진마냥 편하게 해 주었다.

바둑의 관전기는 잘 다듬어진 내용으로 반상뿐만 아니라 반상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희노애락을 들려주었다. 언제나 듣고 싶은 인간 이야기. 도전하고 실패하지만 다시 도전해서 성공하는, 그 언제나 인간의 내면을 두드리는 신화이야기.

60년대 일반기원 풍경. (사진자료/한국기원)
80년대까지만 해도 기원은 여가를 보내는 장소이자 만남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바둑의 쇠퇴는 그 현상에 또한 힘입는다. 도시는 비대해졌다.

90년대 초반, 그것은 분명해졌다. 노태우정권의 주택 200만 호 단기간 공급과 같은 우화(寓話)가 도시의 거대화를 잘 말해준다. 비대해진 도시에서 만남은 큰 비용을 요구한다. 만남은 어렵게 된다.

서로가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통로는 변해갔다. 기원과 다방이 사라져갔다. 때 맞추어 매스미디어의 혁명이 왔다. TV와 인터넷의 급속한 공급. 그것은 만남의 문화를 사라지게 했다. 자동차 문화가 이와 더불어 함께 발달하여 개인을 더욱 더 만남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든 것도 지적해야겠다 .

개인은 소외를 보상할 다른 방식을 갖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더욱 큰 소외를 가져온다고 하지만, 보상의 방식 하나는 개인에로의 침잠이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 바둑만 해도 그렇다. 바둑TV를 보고, 인터넷으로 대국을 하는 것이 편하다. 그 결과 기원은 더욱 더 쇠퇴를 강요받았다.

만남의 문화가 사라지자, 세대간 문화의 단절이 일어났다.

바둑으로 보면 바둑을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에 단절이 생긴 것이다. 한때는 그 방식을 바꾸는 시도도 있었으나 - 이창호의 세계대회 우승을 계기로 - 그 방식인 바둑학원은 상실된 세대간 문화의 연속을 대신해주는 기능을 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학원 자체가 도시화로 인한 결과의 측면도 있지만, 학원에서는 서로 만나는 목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은 만남 속에서 배워지는 것이다. 2008년 갤럽조사에서도 바둑을 배우는 통로에서 바둑학원은 매우 미미한 숫자만 점할 뿐,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다수였다.

바둑을 일으킨 문화가 사라지면서 바둑의 쇠퇴가 시작된 것이다.

2. 성장과정 - 바둑이란 무엇이냐, 사회적 인식의 변화

도시화와 매스미디어의 변화는 바둑이 적응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조건. 그 속에서 바둑은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했는가.

과연 그 얼마나 격변이었나? 반상 반외 몇 가지만 찾아보자.

<표1> 반상의 변화: 196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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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시간: 5시간에서 10분으로

덤: 4집반에서 6집반으로

승부의 방식: 개인 중심 도전권제에서 단체 대항전으로

대국 장소: 여관, 호텔에서 TV, 인터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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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반외의 변화: 196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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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숫자: 64년(34명) 78년(남75명, 여2) 2006년(217명)

국내기전의 숫자: 64년(4개) 78년(10개) 2006년(19개-여류 3, 신예 4)

국제대회 성격: 60년대의 아마 중심에서 1990년 이후 프로 중심으로

대중에게 전해지는 통로: 신문에서 바둑TV와 인터넷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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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격변을 겪었을까? 도시화와 매스미디어의 격변 때문인가?

그런 변화를 가져온 이유는 바둑 자체에도 있었다.

즉, 바둑의 본질이 저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둑을 기예(技藝)라고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기(技)와 예(藝)라는 두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는 승부를 다투는 측면이기에 스포츠와 가까우며, 예는 미(美)와 감성적인 측면을 말하기에 예술로 이해된다.

한국바둑 초창기엔 국민들의 인식에 바둑은 사행성 도박에 가까웠다. 기 중에서도 잡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964년 프로기사 제도를 확정하였을 때 처음부터 강조한 것이 바둑은 예(藝)의 측면이 강한 정신적인 놀이라는 것이었다. 기사들도 그 시각에서 바둑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고자 노력했다.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정신적인 휴식의 도구로서 바둑을 강조했었다.

그러한 노력이 점차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이 70년대 중반 일본 조치훈의 활약에 힘입어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받았으며, 이미 사회적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일본의 프로기사 제도를 국민들도 긍정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와 예 중에서 예에 비중을 둔 것이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의 한국 바둑 성장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프로기사의 경제적 여건은 충분하지 못했다. 1984년 기사들이 기업체에 사범으로 취업을 하면서 많이 개선되었으나 한국의 바둑이 신문기전에 의존한 비중은 너무나 컸다. 신문기전 외 다른 경제적 방편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잠시 1972년 조남철 선생과 대화를 하도록 하자.(「바둑」1972. 5)

(질문) 현재 한국기원에는 62명의 기사가 있는데, 우리 형편으로는 그것도 많은 편이 아닙니까?

(답) “그렇습니다. 프로기사의 수는 바둑팬의 수와 비례돼야 하는데, 우리 여건에 비해서는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사가 많으면서도 없는 과부족 현상을 빚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뜻에서도 기사의 증가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요즘 1년에 춘추 각 2명씩 도합 4명을 입단시키고 있는데, 기사들의 활동무대가 없고보니 소화시킬 곳이 없는 실정이에요.”

(질문) 역시, 아마추어들이 프로기사들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대우하는 풍토가 마련돼야 할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답)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바둑을 즐기는 대개의 사회인사들은 기사를 직업인으로 인식하고 있질 않은 것 같아요. 지도를 받고서도 기껏 저녁이나 대포 한잔으로 때우고 맙니다.“

그랬다. 활동무대가 없었다. 그래서 신문기전에 의존한 때문에

1) 신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커뮤니케이션의 조건이 인터넷의 확산으로 바뀌었을 때

2) 도시화의 규모가 대규모로 변했을 때,

기원이 사라지는 등 바둑의 기반은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사의 숫자는 한국바둑 구조적인 문제로 항상 지적되어 왔던 문제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내면은 흔들린다.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다. 노력의 충분한 보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젊은 세대가 느끼는 정체성(identity)의 위기는, 바로 그런 데서 오는 것인가? 노력의 충분한 보상을 얻지 못하기에?

아마도 바둑 자체의 애호층은 여전히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둑의 하위문화는 취약하다. 바둑을 지탱하는 하위문화가 제대로 육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에 빗대어 말하면, 중소기업이 취약한 것이다. 그러면 외부의 변화에 쉽게 충격을 받는다. 작은 동요에도 내면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공동체 전체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지적되고 있다. 그동안 지나치게 상금 지향적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자아팽창으로, 자신의 인격에 대한 인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호황에는 인플레이션(팽창)이 따르는 법인데 긴축이 없었던 것이다. 이창호가 10억을 상금으로 얻을 때 그것이 곧 바둑계 전체의 내실 확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국민들의 바둑에 대한 이미지, 즉 인식은 긍정적으로 변화했고 또 그 변화된 인식은 오늘에도 긍정적이다. 60년대 바둑에 대해 노름이나 도박과 같은 것으로 보는 안목이 많았던 시절에 비해 80년대에 들어와서는 긍정적인 인식이 아주 높아졌다.

바둑이 잡기냐 오락이냐?

60년대 70년대엔 언제나 이 문제로 시달렸다. 바둑이란 것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60년대에 돌연히 나타난 기이한 사회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둑의 정체성 문제는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놀이에 대한 해석이자, 여가 문화에 대한 해석이며, 도시화를 따라 팽창하는 직업에 대한 경제적 질문이었다.

그것은, 오락과 스포츠나 예술에 대한 개념정의와도 밀접한 현상이었다. 다행히 바둑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건전한 오락이며, 또 문화적으로 볼 때 예술적인 측면이 강하여 정서의 순화나 발달에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60년대 70년대엔 바둑에 대한 적용법이 공연법(흥행물을 대상으로 하는)이었는데, 1980년에 와서 문화예술진흥법(창작예술활동에 관여하는)에 속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법적인 인식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표3> 2008 갤럽 국민인식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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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바둑교육 유의 정도

1) 도움 된다 - 80%
2) 아니 된다 - 20%

자녀 바둑학습 권유의향

1) 있다 90%
2) 없다 10%

다른 취미와 오락에 비해 바둑을 선호하는 이유?

1) 집중력 개발 40.3%
2) 두뇌개발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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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럽조사를 보면 국민과반수(53.3%)가 바둑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30대(56.3%) 40대(55.2%)에서 20대(38.9)보다 강한데, 이는 1980년대를 전후한 바둑의 이미지 상승, 바둑 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국민의 인식 변화와 바둑계 성장은 어느 것이 먼저인가. 그것은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과거 노국수들은 사랑방에서 바둑으로 내기나 두었던 그런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둑이 그리 인식되어서야 바둑의 사회적이고도 문화적인 확산은 불가능하다. 한국바둑의 역사에서 성장과 인식의 변화는 함께 했다.

3. 정체성과 사회적 인식 사이에, 장소가 있고 시간이 있고 승부방식이 있다

예(藝)의 측면을 좀더 살펴보자.

본래 바둑의 본질은 개인과 개인 간의 승부, 그 영웅신화가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신화적 대극(對極)으로서의 경쟁이 바둑 놀이의 핵심이었다. 중국에서 1인자는 국수, 일본에서는 명인으로 불리웠는데 그들의 영광과 그들에 대한 도전이 바둑을 둘러싼 관심이었다.

그것은 신화에 힘입은 것이었다.

중국은 바둑을 도가의 신선사상과 결부시켰으며 일본은 불가의 승려들이 바둑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바둑의 시간과 공간은 세상과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중국의 영향이 상당부분 남아있었는데 해방 이후 60년대부터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바둑의 영향을 입은 것의 하나는, 사회로부터 거리를 둔 바둑만의 공간을 제공한 것이었다. 사흘에 한 판, 이틀에 한 판이 하루 7시간으로 변했지만 고독하게 절연된 세상으로 바둑은 자신을 표현했다. 그것이 동양정신, 즉 기(技)가 절정에 이르면 도의 경지로 승화된다는 정신사적 인식을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둑의 공간이었다.

두 개의 바둑을 보자.

<1도>는 60년대, <2도>는 2000년대의 프로 바둑이다. 어느 바둑이 수준이 높은가? 아니, 어느 바둑이 보다 깊은 인상을 새겨주는가?

1도(1960년대의 바둑)

흑1은 실수. 백4가 맥으로 다음 흑A는 백B 패로 받아 백이 좋다. 흑1은 두지 말고 3에 먼저 젖힐 곳. 그랬으면 백은 A 받을 수밖에 없고 그 때 흑1에 두어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2도(2000년대의 바둑)

흑1은 위축된 수가 아니다. 튼튼하여 프로들이 가끔 둔다. 백4는 모양의 급소로 소위 “후수의 선수”에 해당된다. 흑A 씌움 당하는 것을 미연에 예방하여 우상 백 두점의 수습을 편케 한다.

바둑의 즐거움은 수준에도 영향을 받는다. 10급 바둑보다야 3급 바둑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나 즐거움은 바둑의 수준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본래 바둑의 즐거움은 반상의 제한을 넘어서서 인간을 폭넓게 표현하는 데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 그것이 바둑의 기품으로 우리가 오랫동안 내면에 품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바둑의 공간은 건조해지고 있다. 인간이 살아있던 신화구조는 힘을 잃고 있어 대중들의 흥미는 반감되고 있다. 당연히 바둑에 대한 사회의 지지도 낮아지고 있다.

그 동안 바둑을 떠받치고 있던 신화구조가 약해지고 있다는 점은, 첫째 영웅신화의 뼈대를 이루었던 도전기가 줄어들고 개인으로부터 단체로 바둑의 주체가 바뀌고 있다는 것에서 확인된다.

TV대국은 그 단적인 예로 특히 한국바둑리그와 같은 단체전 형식은 개인을 더욱 더 바둑의 세계로부터 몰아내고 있다. 바둑의 성장과정에서 핵심은 도전기의 형식을 빌린 인간들의 갈등구조, 그것을 敍事(narative)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서사는 사라지고 없다.

바둑에 들어가는 시간도 급격하게 짧아져 이 역시 신화구조를 약하게 만들고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 적절하게 단절된 - 현실로부터 단절되어 신화로서 기능할 수 있는 상징될 수 있는 - 공간이 없을 때, 신화는 사라진다. 신화의 무대가 사라진 것이다.

바둑은 전통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전통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의 본질은 이제 지난 2,500년의 시간을 던지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4. 성장과 정체, 구체적으로는 왜 그런가

돌아보면, 바둑은 어린아이 같던 시절부터 지금 어른처럼 성장했다.

그 성장은 급격한 팽창이 이뤄진 시점이 있었으며 정체되고 퇴조되던 시기도 있었다. 실력으로만 보면, 한국바둑은 놀랍게도 지난 60년, 3점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 성장은 어디서 왔을까. 한국의 바둑은 그 성장의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한국바둑의 성장과 쇠퇴, 그것은 사회학적으로 요인을 찾아서 그만일까? 그것으로 충분히 설명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할 뿐이지, 우리는 훨씬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성장은 단순하지 않았다.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과 모순, 이해와 오해의 과정이었다.

아마도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둑을 즐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데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바둑을 즐기게 만든 여러 가지 변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반상의 수법이 즐거움을 얼마나 선사하는지, 기원에서 만난 호적수가 일요일에 시간을 얼마나 잡아갔는지, 얼마나 몰입을 선사했는지, 김인, 조훈현의 기풍이 그 얼마나 자신의 바둑에 깊이를 더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여러 요인들이 한국의 바둑, 그 역사를 이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러 요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바둑사를 이해하는 것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 여러 요인들을 중심으로 바둑사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식이 될 것이다. 한국바둑사를 하나의 작품으로 본다면, 그 작품의 의미를 이루어낸 의미있는 단위, 반복되는 주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나 문화적 이해에서 모티프라고 불리는 것.

바둑이란 무엇이냐? 그것이 예와 기,

누가 두느냐? 그것이 기사. 내기꾼인가 전문가인가? 그것이 정체성.

어디서 두느냐? 그것이 관철동, 기원. 등등.

두는 사람의 심리는 어떠냐? 그것이 강박 등.

노인과 소년이 두면 누가 유리하냐? 그런 것이 세대효과.

시간을 많이 주면 잘 두나? 그것이 시간의 문제.

반상은 먼저 두면 실제로 유리하냐? 그것이 덤의 문제.

조훈현이나 조치훈은 다른 기사들에게 힘이 되었나? 그것이 천재의 문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서 못 두나? 그것이 여성의 문제.

왜 대중들은 조치훈이나 조훈현, 이창호에게 열광했나? 그것이 신화의 문제.

...

바둑에 대해서 그 동안 고민하고 이뤄왔던 것들은 바로 이러한 주제를 벗어나서 이뤄지고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한국바둑사,

그 성장과 발전을 돌아보면서, 모티프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매우 긍정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앞으로 바둑이 어떻게 해야 발전할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바둑의 정체성은 아직도 뚜렷하지 않기에 다시 한 번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은 필요할 것이다. 비록 스포츠로 되었다 할지라도 바둑의 예(藝)적 측면은 남아있으며, 기(技)의 측면 아직 뚜렷하다. 굳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바둑의 성장은 관념의 변화과정.

관념을 어떻게 다루어 왔느냐?

그것을 탐색함으로서 우리는 바둑의 장점인 예(藝)는 물론이고 기(技)의 측면도 보다 폭넓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를 수놓는 관념에의 이해 없이 어떻게 반상에서도 우리가 인간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