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는 음력 그믐께 해야 된다. 예전부터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지만 이유를 생각해보면 음력 그믐께 벌초를 하고난 다음 추석 성묘때 무덤가에 가보면 풀이 보기좋게 자라나 있어서 그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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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음력 그믐이 낀 일요일이면 벌초를 간다. 이맘 때 남해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되어 몸살을 앓는다. 아침 여섯시만 넘으면 불과 한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너댓시간은 차에서 시달려야 된다. 그래도 그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강물 거스러는 연어들처럼 꾸역꾸역 고향으로 가는 것을 보면 효자가 많은 탓인지, 일년에 한 두어번 얼굴을 비추며 체면을 차리기 위함인지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그 정성들은 갸륵하다.

오늘은 조금 일찍 출발하자는 명이 있어 술취한 사람이 집으로 올 시간인 새벽 네시에 집을 출발하여 본가에 도착하니 서울 계시는 작은 삼촌이 와 계신다. 몇년 전 부터 꾸준히 오시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어 가면서 고향이 그리워지시는 모양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남해 고속도로를 접어드니 오전 다섯시가 조금 넘는다. 안개로 십여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두시간이나 더 걸려서 도착했다. 일찍 나온 수고를 안개라는 놈이 훼방을 놓은 탓 이다. 먼저 오신 친척분과 인사를 하고 삼촌은 큰 아버님과 4 대조 할머니가 계신 창골이라는 곳으로 가시고, 아버님과 사촌동생과 함께 증조부모와 할머니 묘를 벌초 하기 전에 들르는 재실에 들른다.

재실에는 현판과 편액에 한문이 가득 쓰여 있지만 어중간한 한문 실력으로는 읽을 수도 없다. 문듯 不欺堂(불기당)이란 글이 보여 여쭤 보았더니 부엌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엌에서는 속임이 없어야 된다라는 말이란다. 예전부터 며느리는 아래로 보고 사위는 위로 보는 우리네 관습에 따르면 다 고만고만한 살림 살이였지만 친정은 시댁보다도 살기가 더 어려웠을 것 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며느리는 부억의 쌀 한되박이라도 퍼다가 친정집에 주는 일이 간혹 있었던 모양이다. "출가 외인"이라는 꼬장꼬장한 유교적 악습에 물들여 있던 당시로서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기도 하여 부엌이라는 장소를 불기당으로 지은 모양이다.

우리가 한자를 버리기 시작하면서 부터 선조와의 교감의 통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재실에 빽빽하게 쓰인 한문을 이제 뉘라서 읽고 뉘라서 그 뜻을 전할 수 있을까? 재실에 점심과 간식 거리를 두고 예초기와 낫과 제수를 조금들고 오른다.

지난 번에 왔을 때에는 아버님과 같이 와서 낫으로 겨우 다섯기를 벌초하고는 탈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예초기란 놈을 하나 구입했다. 예초기를 사용해서 벌초를 하니 하루종일 하던 것을 불과 삽십여분 만에 끝이 났다. 벌초를 하는 동안에 아버님이 이 곳의 자리를 정리하면 한 두어곳 묘를 더 쓸 수 있다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