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다.
바람을 몰고오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가을비여서 내 마음도 촉촉히 적셔 주는 것 같다.
국정교과서 그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을빛 단장을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낙엽 하나를 보며
혹시 나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얌전한 이슬비 내리는 날을 생각하며
상상의 나라를 여행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녀.
오늘은 어떤 바둑을 두었을까?
참 고약한 바둑을 잘 두는 그녀인데...
성난 파도타기 하는 것처럼 두었던 그녀...
망아지가 배추밭을 뛰어가듯이 두기도 했던 그녀...
모닥불 속으로 팔딱팔딱 뛰어들어가는 청개구리같은 바둑을 두었던 날에는
개골개골 하는 소리가 바둑판에서 정말로 들려 왔다.
그녀의 바둑나이는 초등학교 1학년정도 되는데
이런 바둑을 잘 두는 그녀, 그녀가 그냥 좋다.
그래도 때로는 배추밭의 흰나비처럼 바둑을 두면서
"저 바둑 잘두지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다.
내 눈에는 엉터리 바둑으로 보였는데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바둑이었다
유부녀보고 아가씨가 되어 보세요 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말이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수처럼 생각하는 바둑을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커피를 좋아하듯이 그녀도 커피를 좋아한다.
그녀가 커피 마시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데 나는 잘 알고 있다.
상상의 나라에서 배달되어 온 그녀의 가을편지을 보고 알게 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다 끝나가는 바둑판 위의 바둑알처럼 종알종알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종종 자판기의 커피를 뽑으러 갔었다.
내가 커피를 뽑아오면 "계신가요? 바람님~ 별님~" 하였던 흔적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바둑판이 있는 공원에서 향기품은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마음으로 "커피를 뽑아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녀는 "저도 커피 참 좋아해요" 라는 말만 하였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나도 "한 잔 마셔 보세요" 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북극곰과 남극곰처럼 지냈던 우리...정말로 다행이었다.
만약에 우리가 은빛여우와 잿빛여우처럼 지냈다면
파란만장한 스캔들 속의 주인공 남과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꽃피우며 살아나는 추억의 로맨스를 서로가 공유하고 싶었던 사람들처럼
서로를 알고 지냈다는 것...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녀도 나를 알고 지낸 것을 행운아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빗물로 세수하여 말끔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국정교과서 그녀가 알았던 바람과 별, 나를, 언제나 변함없이 좋아하며
가장 절친한 벗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2007년 9월 19일 수요일
바둑톡톡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