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월여화 (如月如花)/ 도월화



나의 이름은 "도월화 라고 해요" 했을 때 지금까지 그냥 조용하게 넘어간 적이 없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보여준다.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대부분의 선량한 이들은 "이름이 참 좋아요." 한다.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정말이예요?" 하고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다. 신중한 성격이라서 논평을 유보하는 중인가보다. 성격이 급한 이는 "이름이 이상해요." 한다. "기생이름 같아요." 하는 사람들은 자기 표현력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어릴 때는 나도 내 이름이 싫었다.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급우들이 내 이름에 보이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우리 교실에 처음 들어오시는 선생님마다 출석부를 보고 한마디씩 하시는 것도 나를 긴장시켰다. 흔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너무 흔해서 누구 이름인지 조차 모르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한 번 들으면 도무지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는 것이 내 이름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유명인도 아니면서 이름의 굴레 속에서 부자유스러워하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나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역작(力作)이다. 할아버지보다는 외할아버지가 한학에 밝은 분이셨다. 인근에서 출생하는 아이들의 이름이나 비석에 쓸 비문은 외할아버지가 다 쓰셨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군위군이고 어머니의 고향은 의성군이다. 두 곳 다 경상북도에 있다. 외할아버지는 의성군에서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고 한문으로 쓴 문집도 몇 권 내셨다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곳은 외가 집이다. 첫 아이는 친정에서 낳는 것이 그 고장 풍습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딸이라서 분하다고 ‘분순’이라고 그 좋은 학문을 다 접어두고 아무렇게나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한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분할 것 없다고 하시며 직접 내 이름을 다시 지으셨다. 비록 외할아버지처럼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중국 고전을 뒤적여가며 역작을 만드신 것이다. 달 같고 꽃 같으라고 해서 ‘여월여화(如月如花)’라는 문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외아들에게서 처음 본 손녀인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오랫동안 나는 할아버지 상에서 밥 먹고 할아버지 옆에서 자곤 했다. 할아버지는 흰 피부와 은빛 수염에 항상 의관 정제하고 계셨고 풍채가 좋으셨다. 가끔 대처로 나가시면 그 도시의 아이들이 단군 할아버지 나타났다, 아니 세종대왕이다 하고 몰려왔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눈매는 대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었지만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만은 내가 조금만 잘 못 되도 금방 눈물이라도 뚝 떨어뜨리실 듯 인자한 눈빛이셨다.



천자문도 가르쳐주고 전래하는 역사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다. 조간신문에 [수호지]가 연재 될 때였다. 조손(祖孫)간에 밤낮 작중인물이나 스토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했다. 내가 대학 졸업 후 중학교 사회 선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잘 됐다고 매우 기뻐했지만 할아버지는 아쉬워 하셨다. "우리 화-이는 어릴 때부터 책 읽고 데리고 얘기해보면 고시라도 합격할 만 했는데......"하시고. 전공이 법학이니 법관이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할아버지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은 항상 잔잔한 평화가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대한 불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단 한 가지, 내 이름이 특이해서 싫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 거 만 빼고.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던가. 그 당시 친하던 친구 이름이 영희였다.



"할아버지, 내 이름도 좀 영희처럼 지어주시지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서운한 표정으로 '여월여화'에 얽힌 역작(?)의 작명과정을 처음 얘기해 주셨지만 어린 내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할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삼,사십년이 걸렸다. 세월은 나를 깨우쳐주는 스승이 되기도 했지만 그동안 할아버지께서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할아버지는 춘추 83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첫 아이 해산을 앞두고 있던 때라 서울에서 할아버지가 계신 대구까지 가지 못했다.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대신 남편이 병상의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손녀가 몸이 약하니 생각해주라고 부탁을 잊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들 둘을 낳고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지만 이젠 모든 것이 내가 할 탓이다. 내가 잘해주면 좋아하고 몸이라도 좋지 않아서 좀 등한히 하면 당장 섭섭해 한다. 그러니 건강이 나빠져서 식욕이 없을 때도 먹지 않을 자유가 나에게는 없어지고 말았다. 먹고 힘 차리는 것이 외길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경우는 다르지만 친정 부모님도 우리 형제들을 키울 때 잘하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호되게 나무라셨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당연한 부모로서의 도리이다. 내가 잘하든지 못하든지 무조건 '여월여화(如月如花)'로 보아준 분은 할아버지뿐이시지 않았을까.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금도 내가 지치거나 약해질 때 자긍심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준다. 내 마음에 시냇물 같은 잔잔한 평화가 다시금 흐르게 해준다.



나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호소이다. 달 같고 꽃 같은 나의 귀여운 손녀야, 잊지 말아라. 어떤 비참하고 굴욕적인 인생의 고비에서도 너는 나의 귀한 손녀, 여월여화(如月如花)이니라. (1998.) http://ssopia7.kll.co.kr



- 도월화 수필집 ' 여월여화 (如月如花)'/2007년 봄 선우미디어 출간,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