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살아 숨쉬는 김삿갓 계곡을 아시나요


答僧金剛山詩 (답승금강산시)

百尺丹岩桂樹下 柴門久不向人開     백척단암계수하 시문구불향인개
今朝忽遇詩仙過 喚鶴看庵乞句來     금조홀우시선과 환학간암걸귀래  僧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疑     촉촉첨첨괴괴기 인선신불공감의
平生詩爲金剛惜 詩到金剛不敢詩     평생시위금강석 시도금강불감시  笠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찾는 이 없는 삽짝문은 열어본 지 오래되었소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이 지나는 걸 보고
학을 암자로 불러들여 詩 한 수를 청하오   스님

우뚝 뾰족 기기괴괴 하기가
사람도 신선도 신령도 부처까지도 의심스러워 다들 놀라지 않겠소
내 평생 금강산을 읊기 위해 시를 아껴 왔건만
막상 금강을 대하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구려  삿갓

(필자의 번역. 忽, 疑 등의 글자는 약간 다른 자로도 쓰임)

금강산을 찾은 삿갓이 시승(詩僧)을 만나 서로 전기가 통해서 합작으로 지은
詩다. 너무나 장엄하고 기이한 명산의 산세에 압도되어 詩仙 김삿갓의 입에서조차 도저히 詩가 나오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詩를 청하는 스님의 자세나 삿갓의 答詩나 절정고수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평소 김삿갓에 대한 연구를 조금씩 하고 있던 필자는 기어이 그를 찾아 나섰다. 조선팔도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지만 가장 쉽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그의 제2의
고향이요 사후엔 그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한 영월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그를 흠모하는 정도에 비춰 너무나 늦은 출발이었을 지 모르지만 뜻 깊은 그와의 조우가
되기를 빌면서 출발!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니 2시간 남짓만에 김삿갓 계곡 부근에
바로 닿을 수 있었다.

세월이 좋아 2시간 남짓이지 詩仙의 생존시절엔 말 그대로 천리길이오, 산천경치를 읊으며 제법 시인입네 하며 한양길을 나선다면 한 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 김삿갓 문학관



△ 아담한 김삿갓의 묘, 요즘 같은 수명에선 일종의 꽃무덤



△ 마대산에 있는 김삿갓의 생가 유적지로 가는 연무가 피어오르는 산길 1.5Km는 제법 험하다.



△ 초라한 김삿갓의 생가. 그러나 풍치는 결코 초라하지 않다.





△ 김삿갓의 마당 바로 앞 풍치

몇 장의 사진을 연관지어 보면 바로 위의 폭포사진은 김삿갓 마당 바로 앞의 풍광임을 알 수 있다. 산촌누옥(山村陋屋)에 과분한 치장을 한 건 아닐까. 거기에서 나는 흐르는 땀을 씻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물을 떠 마시기도 했다.

시인은 단일 시재로 금강산에 대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금강이 아니고는 시선의 감흥을
돋울 절경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지척에 작은 금강 고이고이 감춰두고
천리 밖 무슨 풍광  그리 찾아 헤맸나요
김삿갓 시선이름 팔도에 남기려 했구나  (필자의 자작시)



돌아 나오는 길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으시시하기까지 한 산중에서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호주머니를 뒤지니
꼬깃꼬깃 접힌 메모지 한 장이 나왔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책받침 삼아 삿갓어른에게 졸시 한 수를 남겼던 것이다.

무정한 김삿갓 이내 친구여
천리길 한 걸음에 달려왔건만
인적이 하수상하니 이를 슬퍼하노라    說客 타고르



詩仙 친구를 둔 죄로 거기에 걸맞은 名詩를 한 수 남기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종이가 없어 다시 쓸 수가 없었다는 변명을 속으로 씹으며 하산을 서둘렀다.


김삿갓계곡은 정말 탐이 나는 절경이었다.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아직
남은 그런 사진은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 담은 모든 것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자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욕심을 이해해 달라는 부탁이다. 길을 넓히고
닦는 개발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 금방 망가지는 것이 우리의 자연 아니던가.


 
     △ 감삿갓 詩碑가 널린 진입로        ▽ 김삿갓 계곡의 벽계수



김삿갓계곡을 찾아가는 길에 주천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주천(酒泉)이라! 시선이 살던 당시에도
틀림없이 있었을 정겨운 마을이름 주천! 金笠은 왜 주천의 詩 한 수를 남기지 않았을까.

獨酌(독작)   이태백(李太白)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천약불애주  주성불재천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지약불애주  지응무주천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천지기애주  애주불괴전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이문청비성  부도탁여현

聖賢旣已飮   何必求神仙
 성현기이음  하필구신선

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
 삼배통대도  일두합자연

俱得醉中趣   勿謂醒者傳
 단득취중취  물위성자전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으리.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천은 땅에 없어야 하리.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였거늘,
술을 사랑함이 하늘에 부끄럽지 않도다.
듣기에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한다 하고,
또한  탁한 술은 현자에 비한다 하였네.
성현 같은 이가 술을 이미 마셨거늘
어찌 달리 신선을 구할 것인가.
석잔을 마시면 대통하고,
한말 술에 자연과 하나가 되나니.
다만 취중의 흥취를 얻으면 그뿐,
깨어 있는 이에게 전하지는 마시게.


贈妓                                    증기

却把難同調  還爲一席親    각파난동조  환위일석친

酒仙交市隱  女俠是文人    주선교시은  여협시문인

太半衿期合  成三意態新    태반금기합  성삼의태신

相携東郭月  醉倒落梅春    상휴동곽월  취도락매춘


기생에게 지어주다  (김삿갓)

처음 만나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에도 능하다네.
옷고름 풀 무렵에 이르자
달그림자까지 합한 세 모습이 새롭구나.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
취해서 매화꽃 떨어지듯 쓰러지네.

註 :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 밤의 흥취에 젖는 풍류시이다. 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李太白의 詩 月下獨酌(월하독작)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 하여 달, 李白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 대한 의문을 이태백의 獨酌(독작)이라는 漢詩에서 찾았다.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천은 땅에 없어야 하리(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金笠이 부르고 싶은 노래는 이미 또다른 시선이 있어 멋들어지게 불러 버린 것이다. 시인이 사랑하고 싶은 술을 하늘과 땅이 먼저 술을 사랑함(愛酒)에 어쩔 수 없이 시인도 술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둘러치기 핑계다.

김삿갓의 贈妓(증기)라는 시에서 성삼(成三)이라는 이백의 시어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백의 獨酌(독작)을 읽지 않고는 삿갓의 贈妓(증기)를 이해하기는 난감한 일이다. 이뿐만 아니라 삿갓의 여러 詩에서 이백의 시향이 은은하게 녹아나는 것이 확인된다. 지금도 새로 발견되는 김삿갓의 시가 많은데 이백의 그것이라 해도 그만이요, 새로 발견된 이태백의 시가 있다면 그걸 김립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다만 이백이 천여년 먼저 살다간 시선이므로 그의 시작이 김삿갓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눈 내린 경치를 읊은 삿갓의 다음 시를 보자. 

雪景(설경)

飛來片片三月蝶 (비래편편삼월접)
踏去聲聲六月蛙 (답거성성유월와)
寒將不去多言雪 (한장불거다언설)
醉或以留更進盃 (취혹이유갱진배)

날리는 눈송이는 삼월의 나비 같고
눈 밟는 소리는 유월의 개구리 같구나
주인장은 추워서 못간다고 눈 핑계를 자꾸 대며
혹시 취해서라도 못갈까 다시 술상을 차리네

그 어디에도 술(酒)자 하나 없으면서 눈경치와 어우러진 포근한 인심이 있고 이미 전주(前酒)가 있었는데 다시 술판을 벌리는 모습이 정겹지 않는가. 하늘과 땅이 굳이 술을 사랑하지 않아도 한설(寒雪)의 꽁꽁 언 동토(凍土)에서 주천(酒泉)이 지천(至賤)으로 솟구치지 않는가. 이 어찌 시선의 경지가 아니고 그 누가 이백의 시작이 김삿갓 보다 앞선다고 하겠는가.(다음에 계속...)

◁ 김삿갓 문학관 앞에서 울산가인 필자^^   


epilogue : 지난달 6월 중순 김삿갓유적지를 다녀왔습니다. 여행기를 한번 쓴다는 게 김삿갓의 말을 빌리면 今日明日하다 보니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특히 이번 장마비에 영월지역이 큰 물난리를 입었다고 합니다. 김삿갓 유적이 있는 곳은 그래도 피해가 미미하다고 하니 천만 다행입니다. 이제 휴가철의 피크를 이루는 시기입니다. 물 좋고 아름다운 계곡, 그러면서 조용한 휴식공간을 찾는 분에겐 김삿갓계곡을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현지의 친절한 설명을 주시고 술대접까지 베푸신 장수촌펜션의 하상수 사장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김삿갓계곡의 여행안내가 필요하신 분은 댓글이나 메일 남기시면 추가설명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