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길
백수는 조깅을 아주 싫어합니다.
왜냐.....
졸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백수가 벌써 오 년째 조깅을 하고 있습니다.
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같이 하는 건 아닙니다.
집에 마실 물이 떨어지면 약수터 가는 날도 있기 때문이죠.
계산을 해보면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조깅을 하고 이틀은 산에 갑니다.
약수터가 제법 멀어서 조깅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합니다.
속도 내기 나름인데 한시간 정도가 보통입니다.
아침부터 너무 힘 빼기도 싫고 한시간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서 벌써 5년째
이 반복적인 일을 해오고 있답니다.
대게 조깅을 하다보면 매일 같은 길을 반복해서 뜁니다.
이런 조건이 조깅하는 사람들을 쉽게 중간에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백수는 매일 하는 조깅에 싫증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코스를 자주
바꾸기도 합니다.
백수가 선택하는 조깅코스는 뻔합니다.
집과 가까운 에덴공원을 몇 바퀴 도는 것과 동네 근처를 원형으로 코스를 정해
이리저리 엇갈리게 달리고 있습니다.
엊그제의 일입니다.
요즘 해가 일찍 떠서 5시 정도면 날이 훤합니다.
그날도 백수는 오로 바둑판 배팅을 쳐다보다가 시간이 되어 조깅 길을 나섰습니다.
평소라면 운동화를 신었을 텐데 그날 하필이면 등산화를 신고 나갔습니다.
백수의 등산화를 잠시 소개하죠.
이 등산화는 K2 등산화로 소가죽으로 된 아주 단단한 등산화로 1987년에 거금
3만원을 주고 산 고급 등산화입니다.
말이야 그렇지 실제로는 너무 단단해 통풍도 잘 안되고 조금 오래 걸으면 발뒤꿈치도
잘 까지는 거의 군화수준으로 보면 됩니다. 요즘 웰빙이니 뭐니 고급 등산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세월을 백수와 함께 대한민국의 산악을 누비던 몸의 일부로
조금은 너덜거리지만 아직도 몇 년은 더 신을 수 있는 백수의 애마(?)랍니다.
하필이면 이런 등산화를 신고 새벽 조깅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새벽길...
비록 아스팔트 위지만 사람들도, 차도 안 다니는 길을 혼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재미는 제법 쏠쏠합니다.
가끔 마주치는 야구르트 아줌마나 요즘은 좀 보기 힘든 재첩국 장사 아줌마를 만날때면
사람사는 세상의 아침을 이렇게 시작한다는 기쁨도 잠시 느낄 수 있답니다.
그날의 코스는 당리동 시장을 지나 국민은행으로 건너서 새로 난 복개도로를 따라 하단동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였습니다. 이 정도 코스라면 한 6키로 쯤 될까요?
당리동 시장의 사거리를 지날 때였습니다.
이 사거리 옆에 조그만 공터와 함께 경로당이 있고 아주 오래된 큰 나무도 한 그루 있습니다.
경로당을 지나 약간 가파른 언덕길을 향해서 달리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길모퉁이 바닥에 두 명의 여인이 아기를 안고 울부짖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여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아기가 경기가 든 듯 눈동자가 풀려있었고 의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새벽에 무슨 일로 어린 아기까지 안고나섰는지 몰라도 상황은 아주 심각하여
시간을 지체하면 아기의 생명도 위험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당황한 아기 엄마는 아기에게 입을 맞추며 숨을 불어넣는 등 뺨도 때려가면서 아기의
의식이 돌아오게 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소용이 없어 보였고 또 다른 여인 한 명은
아기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내게 하려하지만 그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이로 물어서
피를 내게 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 해 보였습니다.
백수가 다가가자, 바늘 같은 것이 있으냐고 물어보았는데, 새벽 조깅 길에 나선 남자의
주머니에 바늘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아기 엄마의 울부짖음은 더욱 커져가고 백수까지 당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기가 숨을 쉬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새벽이라 바늘을 사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지나가는 백수마저 걸음을 멈추고 같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아기가 피를 흘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백수 눈에 띈 게 반찬가게 문짝이었습니다.
알루미늄 샷시로 되어있으며 반투명 유리로 창을 구성하고 있는 낡은 문이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등산화를 신은 발로 문짝을 걷어찼습니다.
순간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유리를 발로 몇 번 더 밟아 조각을 내고 그중 예리해 보이는 유리조각을 들고
아기에게 다가가서 손가락의 윗 부분(손톱 바로 위)을 슬쩍 가로로 베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린 손가락에서 피가 나왔는데 갑자기 아기의 몸이 축 처지는 느낌과 함께
오줌을 지려 버리더군요.
다행히 아기의 호흡이 돌아왔는데 경기하면서 아기도 힘들었던지 엄마의 품에서
잠을 자는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새벽 영업중인 택시가 한대 지나가기에 얼른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경황이 없었던 두 아줌마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제서야 백수도 한숨을 돌렸는데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조깅 코스를 다 돌아도 그 정도의 땀은 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일인지 옷소매로 땀을 닦고 있었는데 바로 그 반찬가게에서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분이 나왔습니다.
그 남자분 깨진 유리문을 한번보고는 백수를 예리한 눈으로 째려봅니다.
제 손에는 아직도 유리조각이 그대로 있었고....
"뭐요? 당신이 지금 우리가게 유리문을 깬거요?"
"아 저...그게...그게...."
할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아니 이 사람아. 왜 멀쩡한 문짝을 발로 차! 차기는!!"
"당신 경찰서 가고 싶어~!!"
"아...저...저...."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트레이닝복 차림이라 지갑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돈도 없고 신분도 확인이 안됩니다.
결국 그 반찬가게 안으로 들어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신분을 확인한 다음
오후에 유리값을 물어주기로 약속하고 풀려(?) 날수 있었습니다.
조깅? 그날 포기했습니다.
집으로 와서는 어머님께 욕 졸라 얻어먹었습니다.
"야 이눔아 왜 남의 가게 문짝을 발로 차~!! 이눔아!!"
외롭고 불쌍한 백수,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말아야 합니다.
저녁에 반찬가게로 전화를 해 봤더니 유리값이 거금 만원이라고 합니다. 흑흑....
여유있게 거금 15000원을 들고 반찬가게로 갔습니다.
담배도 사야되고 또......
반찬가게 아저씨 안 계시고 아주머니가 계십니다.
눈물을 머금고 거금 만원을 드리면서 아침에 말씀 못 드린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이래서 저래서 발로 문짝을 걷어 찬 것이고 그리하여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나이다...하고 여쭈었습니다.
.png){kind=logo}
이전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