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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박한 가을, 昨醉未醒 중, 시를 읽다 |
| 글쓴이 주지스 조회 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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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박한 가을, 昨醉未醒 중, 시를 읽다
- 정진규 시집, ꡔ本色ꡕ, 천년의시작, 2004.
난폭하게 술을 마시고 난 아침이면(가을이라면 더더욱) 나는 자주 감상적이 되곤 한다. 채 몸 밖으로 밀려나가지 못한 알코올 기운 탓인가(하긴 내 몸에서 알코올 기운이 사라지는 날이 있기나 한가), 가령 'TV는 사랑을 싣고' 류의 가공된 추억담 하나에도 슬쩍 눈시울이 붉어진다. 최백호의 오래된 노래 <가을 편지>처럼 가사로만 치자면 삼류에도 못 미칠 노래들도 되풀이 듣고 싶어지고, <일 포스티노>처럼 예전엔 필요이상으로 아름답기만 하다고 멀리 하던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반쯤은 어제 마셔버린 돈과 시간에 대한 후회가 우울을 동반한 탓일 거고, 반쯤은 녹아내릴 듯 나른한 육신의 피로 탓일 테지만, 그래도 나는 폭음 후에 종종 찾아와 주는 그런 감상이,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마셔준 데 대한 보상으로 술이 내게 내리는 축복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숙취가 심한 날 시집에 자주 손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시가 읽힌다.
어제도 대취했다. 시작될 듯 시작될 듯 감질만 나는 가을 기운에 미리 취한 오십대 후반의 사내 둘이서 무슨 사연이 있어 어떤 술을 어떻게 얼마나 마셨는지에 대해 시시콜콜 말할 게재는 아니다. 몇 차례 술집들을 돌고 나니 한두 시간 후면 동이 틀 시각이었다. 돌아갈 채비를 하고 보니 술집 밖의 새벽 공기 속으로 문득 가을이 임박해 있었다.
오전 내내 보살들과 눈 맞추기가 힘들었다. 점차 내 통제력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술을 이젠 줄이겠다고 공언한지 채 열흘도 안 지난 처지이고 보면 표정이 가능한 한 비굴해질수록 후유증은 오래가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다. 보살들의 시선을 피해 이 책 저 책 곁눈질이나 하며 남은 취기를 주체하지 못해 헐떡이다 짜디 짠 비빔밥으로 요기를 마치고 시집 한 권에 눈을 주었다.
얼마 전 나온 정진규의 새 시집을 눈여겨 보아두었던 터이다. ꡔ본색ꡕ(천년의시작, 2004). 숙취가 내린 감상도 아직은 어지간했다. 감정 좋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대로 가을 시 한 편을 찾아 읽었다.
임박하도다 서러움이 임박하고 이별이 임박하고 들려보낼 과일 보따리들이 사과나무 가지마다 가득가득 임박하고 비인 자리들이 採果의 빛나는 시간들이 임박하고 直線의 차가운 얼음들이 임박하도다 쨍쨍 조여드는 공기의 살갗들이 소름들이 임박하도다 몸이 몸 바꾸도다 몸이 지워지고 몸이 태어나도다 靈性의 부피를 얻도다 마른 풀잎들이 그만 누워버린 서릿발 반짝이는 들판, 혼자서 떠나는 獨身女의 한평생이 아득히 임박하도다 讀經 끝난 빈 절간 차가운 法堂 마루가 임박하고 임박하도다 아아, 거기 와 계셨는가 동구 밖 새벽 강물로 疏洗를 마악 끝내신 당신, 얼굴 화안하시도다(정진규, ｢가을｣ 전문)
서러움, 이별, 올 가을에도 자식들의 손에 들려 보낼 과일 보따리들, 채과의 시간을 기다리며 익어가는 사과 알들, 서늘한 공기에 닿아 까칠하게 돋는 피부의 소름, 새 생명을 준비하며 몸을 바꾸는 풀과 나무들, 풍경만큼 깊어지는 영혼, 서리 내린 은빛 들판. 시인은 임박해온 가을의 요모조모를 미리 잘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이미지 셋.
“혼자서 떠나는 독신녀의 아득한 한평생”
“독경 끝난 빈 절간 차가운 법당 마루”
“동구 밖 새벽 강물로 소세를 마악 끝내신 당신”
이 세 이미지보다 더 화안하게 임박한 가을을 요약해낼 언어를 달리 어디서 찾을까. 아니나 다를까, 가을처럼 늙은 시인의 쉼표도 없고 행갈이도 없는, 그래서 거침없는 언어들의 폭포 앞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또 한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가을이 임박했고, 숙취가 또 한번 내게 축복을 내렸고, 보살들은 눈을 흘겼고, 나는 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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