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바둑을 타고... #3

드디어 약속날...

떨리는 마음으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기원문을 열고 들어서니 뿌연 담배연기 속에 여기저기서 돌 놓는 모습이 보이는 가운데 정작 여자는 자기 혼자뿐이지 않는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으려니 뭇 시선들이 자신에게 꽂힌 것 같은 거북함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원장님께 약속이 있다는 말과 함께 바둑돌을 만지고 있는 중에 누군가 말을 시킨다.

"안녕하세요... 나예뻐님이시죠?"

오마이 갓..

나예뻐씨의 눈은 환상을 보듯 한곳에 집중되었다.
이렇게 잘 생겼을 수가...

180cm의 정도의 늘씬한 키에 귀공자 풍의 용모는 나예뻐씨의 맘을 소녀처럼 마냥 부풀리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쪼끔 아주 쪼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발가락지의 때만큼이나 하찮은 것으로 인식될 뿐....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드디어 대회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날...

그날도 둘이는 기원에서 만나 열심히 공부한 후 기념으로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자는 말에 호프집에 마주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감입니다.
지금 실력이시면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너무나 고마워요... 이 보답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저야 그냥 나예뻐씨가 좋아서 그런 것인데요 뭐..."

아.. 날 좋아한다고?!
왜 이렇게 얼굴이 간지럽지?
혹, 저 사람한테 들킨거 아닐까?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와중에 나고수씨가 다정스레 말을 건넨다.

"저는 꼭 우승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날 대회가 끝나면 저하고 데이트 한번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곤란 하신가요?"

"글..쎄...요....시..간...이...될...지..."

"그날 5시에 끝나니 6시부터 시청앞 사랑해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겠
습니다. 오실 때까지 무조건 기다릴테니 늦게라도 꼭 와주세요...."

나예뻐씨의 머리는 잠시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여태까지는 바둑이라는 명목으로 만났다지만 이건 정말로 남녀간의 데이트 아닌가!

그것도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아무리 남편이 밉다고는 하지만 마음 속에 드리워진 죄책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행동으로는 고개를 끄덕끄덕했지만 이미 마음 속에서는 나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고 또 했다.

드디어 대회날....

나예뻐씨는 그동안 닦은 실력으로 승승장구..
오후에 벌어지는 4강까지 차올랐다.

그러나.....4강전에서 다 이긴 바둑을 통한의 떡수로 말미암아 거꾸로 대마가 몰살
하는 바람에 탈락.....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동안 남편한테 구박 받으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사람한테는 무슨 면목으로 다시 만나나?
이런저런 생각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흥....남편이라고...."

갑자기 나고수씨가 보고 싶어진 나예뻐씨...
시계를 보니 5시 32분....

"그래 그분이면 내 맘을 다스려 줄 수 있을거야...."

남편에 대한 야속함에 무조건 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에 도달하니 너무 일찍 온 듯...

다시 돌아갈까 망설이다 이왕 온 것 얼굴이나 보고가지 머....얘기만 하면 되잖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려니 웨이터가 와서 말을 건넨다.

"저....손님...나예뻐씬가요?"

"예..그런데요?"

"어떤 신사분이 이 쪽지와 선물을 건네주시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나예뻐씨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웨이터가 전해준 쪽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낯익은 글씨체로 글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여보....오늘 고생 많았소....
당신이 빈털터리인 내게 시집 온지 벌써 5년...

그동안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도 항상 밝게 지내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항상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오.....
두 아이의 엄마로... 또 나의 사랑스런 아내로...

생각나오?
우리 결혼식 때 했던 맹세를.....
남들처럼 버젓한 신혼여행도 못가고 호텔방에서 지낸 하루였지만 열심히 열심히 살자고 했던....

그날 나는 맹세했었소...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할 거라고...

한달 전 당신이 바둑대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소...

내가 못나서 당신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구나 하고 나 자신이 한참 초라해지기도 했었소...

그러나 당신의 굳은 마음을 보고 바둑이란 것이 강인한 목표와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상태에서 해야 하는데 집에서 내가 가르켜 준다면 제대로 안될 것은 뻔한 일.....더군다나 아이들이 옆에서 칭얼대면 당신은 더더욱중도에서 포기할 것이고...

그래서 다짐을 했소...
당신한테 오기를 심어주기 위해 일부러 팅팅거리기로...대신 옆집 아저씨한테 인터넷 바둑 두는 법좀 가르켜 주라고 부탁했었오. 친한 친구에게 인터넷에서 만난 것처럼 해서 지도도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오늘 비록 3위에 머물렀지만 그게 어디요...
나는 당신이 한없이 자랑스럽소....
동봉한 포장에는 제주도 여행권이 들어있소...
당신이 내게 준 용돈을 모아 한 달동안 틈틈이 모은거요...
해외 구경은 못해주지만 이번 주에 우리 제주도로 여행이나 떠나지 않겠소?

아참....지금 나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소?
우리 둘이 맨 처음 만나서 갔던 레스토랑 기억나오?
거기서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소....
사랑하오... 영원히.....


무언가 뺨에 끈적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코를 지나 입을 통과하면서 짭짜란 맛이 입술에 전해져 온다.
나예뻐씨는 혀를 내밀어 그 물을 맛보았다.

달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감미로운 맛이다....

순간 나예뻐씨는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사랑해요 여보 사랑해요 사랑해요... 를 수없이 외치면서...


================= 사랑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