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TV를 멀리하는 편이지만 자연 다큐를 접하다 보면 상식을 뒤집는 현상에
때론 놀라기도 하고 감명받기도 한다.

문득, 오래 전에 비둘기 경주에 관한 프로를 시청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둘기' 하면 평화를 상징하는 새로 널리 각인돼 있지만
요즘은 도심 비둘기의 오지랖넓은 극성과 왕성한 번식력, 미관을 해치는 오물 등으로 인해
제거를 심각히 고민해야 할 정도로 천덕꾸러기가 돼버렸다.

그래서 비둘기에 대한 내 인식도 어느 새 부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프로를 보면서 새삼 비둘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슬좋은 부부는 곧잘 한쌍의 원앙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첨단기술의 총아인 유전자검사 기법으로 인해 그러한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새끼들을 검사해보니 아버지가 제각각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원앙의 암컷은 일부일처제 하에서의 정조 의무를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수컷인들 혼자만 순진하게 정조를 지키고 있었겠는가?

정작 일부일처제를 확실히 지키는 넘들은 비둘기였다.
그들 부부 침소에서 못생긴(?) 마누라를 빼낸 다음, 젊고 예쁜 암컷을 투입한 실험은
다소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많은 씨를 뿌리고자 하는 수컷의 원초적인 본능을 어쩌라고...
그런데 이게 웬일?
구석에서 눈치보는 암컷 비둘기에게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않고
이유없이 집 나간 마누라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조바심내며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동물적인 본능마저 거스르는 비둘기의 부부애가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인간은 민법 제840조 제1호처럼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재판상 이혼사유로 규정해 놓아야만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는 디...

원래 비둘기는 방향감각과 귀소본능, 그리고 장거리 비행능력이 뛰어나다 하여
BC 3,000년경부터 통신에 이용한 기록이 있고
징기스칸의 유럽정복 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활용되었지만
요즘은 통신수단으로 쓸 일이 없어지니 장거리 비행 경주가 성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정식 경기는 1,800년대 초에 '벨기에'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마을마다 비둘기 애호가 클럽이 있을 정도로 경주를 즐긴다니 흥미롭다.

경주는 접수번호가 찍힌 각대를 비둘기 다리에 채우고서 경기 출발점으로 이동해
지정된 장소에서 동시에 날린 다음 최단시간 안에 둥지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게임이다.
출발점에서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오른 비둘기들은 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는 듯 하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한쪽 방향으로 비행을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땅이 좁아 400 ~ 500km 코스가 고작이지만
외국은 1,000km, 2,000km가 넘는 장거리 경주도 있고
세계 최장 귀소기록은 3,700km에 이른다니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더더욱 놀라운 건 그토록 먼 거리를 먹을 거 마실 거 외면하고서
내 한 목숨 바쳐 죽자사자 날고 또 날아가는 연유였다.
대체 뭣 땜시???

알고 보니 경주용 비둘기는 홀애비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둥지에 홀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장난으로 강제 이별당한 상태를 최단시간내에 해소코자 하는 몸부림이
'비둘기 경주'로 포장되었을 뿐이었다.
      
남편 비둘기의 절절한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순이야 쪼끔만 기다려, 금방 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