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리 북한산 올라가는 초입 길가에 그 이층집이 있었다. 내가 인근 암자에 머물던 때였는데(고시생20여명과 기타10여명이 하숙했다), 저택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양옥집임에도 흉물스레 비워져 있었다.
넓은 정원에 잡초가 무성하고 유리창도 한두개 깨져있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일가족이 살해당했다던가 자살한 사연이 있는 귀신 나오는 집인데 3일, 혹은 일주일, 한달..들어가 버티는 자격요건이 문제였을 뿐 누구라도 들어가 살 수만 있으면 평생 공짜로 살게 해준다는 건 확실하단다.
주요 길가에 있어 외진 곳도 아니었고 가로등은 없었지만 고작 수십미터밖에 다른 집들도 있었다. 당시에도 몇억은 갈듯한 집인데 오랫동안 비워져 있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낮에 집안까지 들어가봤는데 벽지나 바닥재가 약간 찢겨지고 문들이 좀 훼손되었을 뿐인 멀쩡한 집이었다. 버려진 옷가지나 술병 과자봉지 개스통등 이런저런 쓰레기가 얼마간 널려있었다. 그로 미루어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탐사했던듯 싶었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계곡가에 있는 암자도 시원했으나 고시생들을 방해할 수 없고 절에서 술먹고 떠들기도 곤란하여 밤 열시경 다섯명이 작당하여 술사들고 그 흉가로 쳐들어갔다. 이미 꽤 오른 술기운으로 인한 객기였으리라. 달빛은 밝았지만 전기가 안 들어와 후레쉬 두 개와 개스버너를 가지고 대문을 거쳐 잔디정원으로 들어서니 왠지 기온이 바깥보다 1~2도 뚝 떨어지는 걸 느꼈다.
문을 박차고 거실로 들어가 술을 먹으며 귀신에 대한 농담을 하며 지껄였지만 왠지 술이 취하지 않고 점점 선듯선듯 추워오는 것이 아닌가. 내만의 착각도 아닌 것이 다들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난 본래 옆에서 벼락이 쳐도 꼼짝않는 무딘 체질이며 귀신을 전혀 믿지 않는 인간이었지만 정말이지 평소에 아무리 큰 소리쳐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틀려지는 것 같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던 후배의 노래도 끊기고 술을 따르던 친구의 손이 떨렸던가, 잔을 든 내손이 떨렸던가? 좀 춥다고 불이라도 피우자고 하여 종이와 쓰레기를 모아 작게 불을 피웠는데 그게 또 실수였다.
불빛에 투영된 우리들의 그림자가 사방벽에 너울거리자 더욱 기분이 나빠지고 모두의 바로 뒤쪽 부분이 잘 안보이는 사각이 되는 것이었다. 점점 쫄아들어 대화가 끊긴지 기껏 일이분 되었을까, 먹보에 뚱보에 평소 장비같은 무대포인 P라는 친구가 갑자기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어어어~”하며 일어서서 밖을 향해 튀다가 나동그라졌다.
그 바람에 빈 술병이 땡그랑 땡땡 굴러가고 나를 비롯해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공황의 도가니가 되었다 “뭐야” “튀어” “아이고 엄니” “지랄”소리가 동시다발로 나왔는데 그중에서 난 아무래도 튀어라고 소리 지른 것 같다.
그래도 동료가 쓰러져 있어 모두 출행랑을 치진 않았다. 바람같이 현관밖에까지 튀었던 두명도 이내 되돌아왔고 난 어떤 넘에 차여 날아간 내 소유의 버너와 후레쉬부터 챙겨들었는데...
장본인인 피의 말로는 2층 올라가는 계단 뒤에서 빨간 모자를 쓴 하얀 얼굴의 여자를 봤다는 것이다! 후레쉬를 아무리 비쳐봐도 여자커녕 고양이 한 마리 없는데 놈은 시력이 2.0이라는둥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새빨간 베레모를 쓰고 갸름한 얼굴에 매우 미모이고 키가 좀 커 보이고 검은 옷을 입은 것 같다나, 이리 어두운 집안에서 새빨간 색이 확연이 발현될 리도 없건만 놈은 그여자 오른쪽 뺨에 검은 점이 있는 것도 똑똑히 봤다며 어서 나가자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때 그 소리가 들렸다. ‘차르륵’ 내가 먼저 들었고 내 손짓에 나머지도 모두 들었다 ‘차륵’‘차륵’ 소리는 이층 쪽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거실과 방두개와 화장실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규칙적이진 않지만 간헐적으로 들리는 그 소리는 도저히 원인을 추론할 수가 없었다.
올라가보자고 말하는 넘도 하나 없었지만 나부터가 얼른 따뜻한 바깥으로 나가고만 싶었다. 결국 열두시 넘어까지 버티려던 우리는 처참하게도 사십분도 채 못 버티고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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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그 집을 보면서(절에서도 조금 보인다) 간밤의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갔다.
해서 정오경에 슬며시 혼자 다시 가봤다. 밝은 대낮이었건만 을씨년스런 넓은 집안이란 역시 찝찝했다. 각목을 주워들고 계단을 오르면서 벼라 별 생각이 다들었다. 어디 간다고 쪽지는 써놓고 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쩜 유서까지 써놨어야 되지 않았을까..후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껏해야 비둘기등 짐승내지 부랑자정도일 거라고 힘을 냈다.
해서 이층을 대강 훑어봤으나 새종류도 부랑자도 없었다. 혹 문뒤에 바짝붙어서 숨어있나 살펴보는데도 정말 온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섬을 느꼈다. 이때 바로 등뒤에서 예의 ‘차르륵’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다가 “아야~!” 비명성 고함을 지르며 돌아서보니 아무 이상이...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대형 달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계단 중간쯤까지 가서 퇴로를 확보하고 달력을 잠시 주시하니 과연 다시 바람에 펄럭이며 비키니 아가씨의 겉장이 말려 올라가며 ‘차르’소리가 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나는 보고야 말았다! 속장에 빨간 모자를 쓴 예쁜 미인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오비인지 크라운인지 혹은 다른 회사인지 모르지만 맥주회사에서 나온 달력이었는데...
다시 펄럭이며 똑똑히 봤는데 베레모인지 빵모자인지까지는 확인할 순 없었다. 갸름한 얼굴인데 오른쪽 뺨에 점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었다. 이건 말도 아니다라고 독백하며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는데 왜 저게 펄럭이는 거야? 하며..머릿속이 노래진다는 말이나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실감했다.
가까이 가서 확인도 못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대문밖 계단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는데 등이 식은 땀 때문에 축축한 걸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피에게 가서 내 모험을 숨기고 다시 캐물었으나 놈은 분명 하늘에 맹세코 봤단다. 그렇게도 자기를 못 믿느냐며 그림까지 그려주는데 꼭 은하철도999의 메텔같이 생긴 여자였는데 달력속의 그녀와 70~90%정도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결국 귀신은 없다에서 있을 가능성이 반 이상이라고 내 신조를 수정하고야 말았다.
다시 그 집을 탐사한다든가 그 달력의 출처를 추적하고 싶은 의욕은 없었다. 겁나서는 아니고 그냥 뭐 생기는 것도 없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희피한 것인데..그 얼마 후 암자를 떠났고 겨울에 놀러갔는데..
그 집의 일가족 살해니 자살내력은 전혀 근거 없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주인이 사업하다 망해 경매로 넘어갔을 뿐이라나. 물론 그마져도 확인된 진실은 아니다. 어떤 복덕방 사장이 그랬다는데 믿지 못할 것도 없지만 집 팔아먹으려 비극적인 참사의 진실을 은폐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네에 우리 특공대 소문도 황당하게 퍼져서 한명은 부상을 입고 또 한명은 귀신들려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한명은 헛소리를 하는등 나사가 빠졌다나?
그 후 몇 년이 흘러 특공대와 다시 만나 그 사건을 회고하는데 모두의 시각이 조금씩 틀리는 건 물론이고 사소한 과정에서도 기억이 제각기 달랐다.(내 개인적인 모험은 끝내 감추었다) 심지어 내 자신의 기억도 조금씩 틀려진 걸 당시의 비망록을 통해 확인하고는 도시 무슨 조화속인지.. 혹 귀신의 농간이 아닌지 헷갈렸다.
특공대의 정론은 피가 겁에 질려 헛것을 봤다는 것인데, 나는 거품 물고 억울해하는 피를 변호하며 세계의 불가사의한 귀신이나 유령사례를 들어 희석시켰던 것이다.
모델인 미모의 그 집 딸이 치정에 휘말려 엽기적인 참사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공상도 하고, 과학책에서 기류(바람)의 작용등도 유심히 연구하고 이층의 달력 사진이 거울에 비쳐 이러구러 계단쪽에 투영된 것이 아닌가 추측도 했지만..
그런데 5,6년 전인가 빌어먹을!
평생 히트커녕 죽을 쑬(진짜 심한 욕이다) 피라는 놈이 끝내 실토하고야 말았다. 다른 놈들에게 소문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서야..문득 왈칵 무서운 생각이 밀려와 그랬다는..꼴사납게 넘어져 너무 쪽팔려서 지어낸 픽션이라는 것이다!
얼떨결에 넘이 구상하던 순정만화의 캐릭터가 튀어나온 듯하다나..
아아~ 지랄, 그럼 나는 뭔가?
그 다음날의 피튀기는 처절한 모험과 지난 십 년 이상의 갈등과 찝찝함에 대한 보상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물론 협박공갈로 술은 몇 번 빼앗아먹었다) 모두 다 멀쩡한데 나만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을 만들어서 혼자 지지고 볶은 한심한 화상이 된 꼴이 아닌가..
그렇긴 해도..이제 와 곰곰 생각해보면 귀신은 있었다. 영영 안나올 수도 있지만 언젠가 튀어나와 내 맹목을 파고들 기회만을 노리며 내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특공대의 당시 후일담도 어쩜 사실일 수 있다. 진실이 폭로되어 비웃음 당할까봐 피는 얼마나 고민하고 자기 양심과 싸웠으랴, 그게 마음에 큰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고 뭔가? 또한 다른 한 넘은 알콜중독으로 정신병원을 두어번 들락거리더니..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북경의 나비날개짓이 아메리카의 허리케인이 된다고 옛날 그 사건이 씨앗이 되었을 개연성을 꼭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리고....
나사가 빠져 횡설수설하는 또 한 피해자는 오늘에 이르러 오로의 여러 벗님네들까지 헷갈리게 만들고 있잖은가 말이다. 구신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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