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

내가 바둑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꽤 오래된 셈이다. 지금도 겨우 동네 5,6급이니 기재야 미루어 짐작하시라. 옆집 사랑에서 어른들이나 형들이 두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별로 두지는 않고 주로 관전만 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공부 제일 잘하던 녀석이 나보다도 고수였는데 학교전체는 물론이고 동네 1인자였다(당시2,3급이라고 주장하는 기력이었다).

어느 날, 녀석이 한 오십대인 분과 바둑을 두게 되었다. 바둑은 거의 종반에 이르렀는데 변쪽의 실리가 월등한 친구 놈이 이긴 판인데 상대쪽에서 친구의 중앙 쪽에서 완벽히 살아있는 대마 안으로 한발 한발 쑤시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봐도 사단의 건더기가 없었기에 친구는 손을 뺐다. 그것도 무려 5,6차례나..물론 매번 철저히 검토한 후에 말이다. 결과는? 친구의 대마는 함몰하고 말았다.

나나 친구나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못하고 입만 딱 벌렸다. 아쉽게 기보는 기억해내지 못해도 만약 남아있다면 지금 봐도 어지간히 골 때릴 바둑이 틀림없다. 대여섯번중에 한번이라도 응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세번 응수했어도 대마가 겨우 사는 형국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너무 충격을 먹어 상대였던 그 장년분과 다시 두지는 않았지만 그 고수의 정체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인데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바둑이다.

어쨌든 나도 한때는 어지간히 바둑을 즐겼건만, 막심한 시간소모와 지력소모를 체득하고 나서 주로 관전으로 돌아섰다. 마음수양은 글쎄...스럽고..풍족하고 여유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취미이자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찝찝함

바둑과 멀어진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둑은 뭐니뭐니해도 하수를 뻥뻥깨는 재미가 최고고 그 다음으론 호적수와의 승부 같다. 물론 호적수와의 승부도 내 승률이 조금 더 높아야 된다는 조건아래서다^^ 너무 이기적인가? 호적수와의 승부에선 사실 지더라도 유쾌하다. 문제는 고수와의 승부다. 사기급수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어도 고수는 하수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면 당연한 것이겠지만..진짜 승부라면 만방을 깨져도 개운할 텐데, 고수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가벼이 대강 이겨버리니 어찌 기분 나쁘지 않을 손가? 요행 내가 이기더라도 고수가 작전상, 인정상 져준 게 아닌가 싶을 때도 많고 뒤끝이 개운치가 않다. 그 증거로 보통 둘 때는 건성 두어 질 때가 많은데, 내기라도 걸리면 딴 사람으로 돌변하여 거의 다 이겨버리니 이 어찌 얄미워 보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내 개인적인 주관이지만 가령 100;0으로 이길 수 있는 실력인데도 100;99로 맞추어 이기는 것이 승부인가? 도대체 바둑 말고 어디에 和局개념의 스포츠나 승부가 있단 말인가? 실은 많이 있다. 아니 스포츠엔 모두 있다. 허나 후배니까, 여자니까, 선배니까, 상사니까, 기죽지 않게 삐지지 않게 적당히 ‘요리’해서 이겨야지, 혹은 져줘야지, 비겨야지...

이 어찌 자존심 빼면 쓰러질 화상이 참아낼 것인가 말이다.

물론 고수도 고수 나름이니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넷바둑이라면 모를까, 친척친지, 동네사람은 뻔히 기력을 아는데 누가 지능적으로 농락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