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첫눈을 싫어합니다.
첫눈이 오면 어린 시절의 아린 기억 하나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그 해의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저는 그해 여름 방학때 어머니 성화로 주산 학원을 나가게 되었는데
학원의 천정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한 여름이면 뜨거운 햇볕이 그대로 들어와
실내안은 찜통이 되버려 우리들은 늘 땀을 뻘뻘 흘리며 수업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있는 선풍기 두 대는 종일 틀어논 탓인지 더운 바람만 쏟아 내고
선생님의 숫자 부르는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꾸벅꾸벅 졸음을 재촉하곤 했습니다.
벌써 땀으로 흥건히 젖은 친구의 넓은 등짝을 바라 보니 한숨만 새어 나올뿐,
어서 수업이 빨리 끝나길 고대하며 제 마음은 벌써 왕숙천으로 달려가 있었습니다.
오후엔 동네 친구들과 왕숙천에 고기 잡으로 가기로 했었거든요.
해마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왕숙천으로 달려가 물놀이를 즐기곤 했었는데
실컷 물놀이를 즐기다 허기가 지면 송사리며 피라미 같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
라면에 파,마늘 대충 집어 넣고 한 솥 푹 끓여 내어 양푼 그릇 하나씩 나눠 먹던 기억이 납니다.
30 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무슨 쏘가리며 메기며 하는 매운탕도 많이 먹어 봤지만
그때 친구들과 나눠 먹던 매운탕의 맛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비몽사몽 어느덧 수업도 끝나고 더운데 고생 했다는 선생님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책이며,필기구들을 주섬주섬 책가방에 챙기고는 서둘러 학원문을 나섰습니다.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엔 깔딱 고개라고, 오르려면 제법 숨이 차는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행여 친구들과 약속에 늦을라 먼지 나는 고갯길을 숨 쉴틈 없이 달려 올라 갔습니다.
등에 멘 책가방은 평소보다 몇배의 무게로 저를 누르고
한 낮의 뜨거운 열기에 고개 위 소나무는 아지랑이처럼 심하게 이글거립니다.
그때 아련하게 멀리 보이는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땅으로 쓰러집니다.
혹시 사람이었을까, 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허둥지둥 오르막길을 단숨에 달려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하얀 브라우스에 바이올렛 체크 무늬 치마를 입은 소녀 하나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붉게 상기 된 뺨과 이마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고 연신 숨을 몰아 쉬는 폼이 꽤 힘들었나 봅니다.
소녀의 옆엔 커다란 가방과 책같은 것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먼가를 하긴 해야 겠는데
평소 쑥맥이란 소릴 듣던 저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어쩔줄을 모르고 서있기만 했습니다.
그 소녀도 별 말이 없이 엎드린채 저를 쳐다 보고 한동안 그렇게 우리는 서로 바라만 보았습니다.
잠시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주워 들고
"괜..괜찮니? "
하며 처음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 되었습니다.
그 날 저는 소녀의 가방을 들고-나중에 알고 난거지만 바이올린 가방이었습니다.
그 고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소녀의 집까지 들어다 줬습니다.
집에는 할머니 혼자 계셨는데 소녀의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부모님은 주말에나 한번씩 내려 오셔서
평소에는 할머니와 둘이서 지낸답니다.
할머니께서는 연신 고맙다고 하시며 바나나며 파인애플같은 과일들을 내오셨는데
그당시 저희집 형편으로는 평소 먹기 힘든 과일들이어서 저는 친구들과의 약속은
까맣게 잊은채 무척 좋아하며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한동안 소녀를 보지는 못했는데 여름이 다가고 낙엽이 하나둘 지기 시작하던 어느 초가을 날,
저는 우연히 그 소녀의 집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쪽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였는데...
그리로 가면 훨씬 멀리 돌아 가는 셈이었는데...
제 발걸음은 어느새 소녀의 집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비도 오고 해서 멀리 돌아 가느라 비도 더 많이 맞게 될텐데...이런, 바보같은...생각도 들고...
하지만 혹시나 소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나, 그런것이었나 봅니다.
소녀의 집앞을 지나는데 대문앞에 소녀가 마침 보입니다.
소녀가 먼저 저를 보고 부릅니다.
"안녕"
"그래...아,안녕.."
"근데... 비 오는데 집에 안들어가고 왜 서있어?"
"응...오늘 할머니께서 병원에 가셨는데 아직 안 오셨거든.내가 열쇠를 깜빡 했어."
소녀는 꽤 긴 시간동안 문앞에 서 있었는지 오돌오돌 떨면서 입술도 파랗게 변한 것이 추운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담장을 홀깃 한번 보고는
"내가 담을 넘어 가서 문 열을까?"
"담이 높은데...쇠창살도 있어.힘들거 같은데..."
힘들거 같다는 소녀의 말에 무슨 결심을 한듯 저는 굳게 입술을 다물고 담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때는 소녀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들뜬 마음에 너무 서둘렀는지 담을 넘다 쇠창살에 긁혀서 그만 교복 바지가 찢어 지며 피가 났습니다.
아픔보다는 창피한 생각이 들어 숨기려고 했지만 소녀가 그것을 보고 한사코 약을 발라야 한다며
집으로 같이 들어 가게 됬습니다.
사실 솔직히 쇠창살에 크게 긁히는 바람에 무척 아팠었습니다.
하지만 소녀와 좀 더 같이 있을수 있게 됬다는 것에 그저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때 다리에 생긴 흉터는 한참 동안 없어지지 않았었는데 저는 그 흉터를 볼때마다
설레임인지 즐거움인지 웬지 가슴이 뛰기도 하고 흐믓한 생각도 들며 이상한 감정 같은걸 느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가끔 소녀의 집에서 공부도 같이 하며
할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서로 좀 더 친하게 된거 같습니다.
소녀의 부모님도 몇 번 만나 뵐 수 있었는데 소녀의 아버지는 목소리도 굵직하시면서 정말 군인답게
위엄 있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어머니는 tv에 나오는 배우같이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그당시 소녀는 몸이 좀 안 좋아서 학교에는 당분간 나가지 못했고 소녀의 집은 원래 서울이었는데
지금은 이 곳 할머니댁에 내려와 같이 살며 읍내에 있는 바이올린 교습소에만 일주일에 한두번
다닌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저에게 이곳에는 소녀의 친구가 별로 없으니 자주 좀 놀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소녀와 단 둘이서만 밤을 세운 날도 있었는데 할머니가 급한 일로 병원에 입원 하셔서
소녀의 아버지는 잠깐 병원으로 오셨다가 군 일때문에 바로 들어 가시고
어머니만 병원에 남아 할머니를 간호하기로 하셔서 소녀만 집에 혼자 있게 됬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께서 소녀가 무서울지 모르니 오늘 하루만 집에서 소녀와 같이 있어 달라고 하셔서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단 둘이 있게 됬을때 소녀가 제게 바이올린 연주를 해 주었는데 사실 무슨 곡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그 아름다운 연주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바이올린 명곡들을 들어 봤지만 그때의 그 소녀의 연주만큼
저의 마음속을 울렸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그 아름다운 소리는 지금도 저에게 천상의 화음으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고 소녀가 "우리 영화 볼까?" 하며 비디오를 하나 들고 나왔는데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를 저는 그때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저 여자 주인공 예쁘지?"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제 마음속으로는 소녀가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그 영화를 여러번 봤는지 다음에 나올 장면들을 이미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 주인공 나중에 죽는다..."
사실 그 때는 영화를 보면서도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안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그때 소녀가
그 여자 주인공을 동경하는건지, 연민을 가지는건지 지그시 바라보던 그 눈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즐겁게 놀다가
밤이 한참을 지나서야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사실 저는 자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잠을 잘수가 없었습니다.
소녀가 제 어깨위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는데 그때 저는 알퐁스 도데의 별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저 밤하늘에 반짝이던 맑고 순수한 별 하나가 지금 내 어깨위로 내려와 잠을 자고 있다고....
그 날 이후로는 소녀를 더이상 만나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갑자기 일이 생겨 서울로 돌아가게 됬다고 하셨는데
소녀가 인사도 안하고 간것에 대한 서운함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일상은 별 다른게 없이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찬바람이 쌩쌩 불던 12월의 겨울날,
얼마 안있을 겨울 방학에 다들 들뜬 마음에 친구들과 떠들며 장난 치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저를 찾으시는 겁니다.
급하게 너를 찾는 사람이 있으니 가서 전화를 받아 보라고 하시더군요.
교무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더니 소녀의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거였습니다.
저는 반가운 생각에 인사를 드리는데 소녀의 어머니는 저에게 서울에 한번 올수 있냐고 하시더군요.
소녀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저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니 잠깐 와달라고 하셨습니다.
병원에 있다는 얘기에 걱정이 들긴 했지만 크게 급한일일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좀 있으면 방학이니까 방학때 갈까요? 했더니 내일이라도 올수 있냐고 하시더군요.
내일은 학교 가는 날이라 어려울거 같고 일요일날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결국 며칠 뒤 일요일, 저는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하늘을 보니 눈이라도 올려는 듯 잔뜩 찌푸려 있습니다.
저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소녀의 어머니가 알려주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못 봤는데 어떻게 변했을까,몸이 많이 안좋은건가 하는 걱정도 하며 소녀의 병실로 들어 섰습니다.
병실 안을 들어서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녀가 보였습니다.
소녀의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옆에서 울고 계시더군요.
소녀의 어머니께서 들어서는 저를 보시더니 왈칵 눈물을 쏟으시며 저의 손을 꼭 쥐시고는 말하시는겁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니,,,
방금전에 소녀가 죽었답니다....
소녀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게 두가지 있었는데 , 바로 첫눈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도 보고 싶다고 했다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눈물이 핑 돌더니 울컥 하고 쏟아 져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밖엔...
창밖엔 하아얀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큼직한 하얀 눈송이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을 기세로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늘을 보니 구름이 잔뜩 깔린 것이 눈이라도 한바탕 내리려나 봅니다.
이렇게 첫눈이 오는 날이면,
전 오늘도 조용한 술집을 찾아 애상을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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