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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12345/*/++ 조회 73 |
작성일 2003-07-02 오후 10: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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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청춘을 바쳐, 아니 일생을 걸고 노동운동을 한 친구가 있다. 무려 20여년 만에 만난 이 친구는 노동운동을 접었다. “왜?”라는 질문에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했던 노동자는 없어”라고―.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는 한 대기업에 노동문제를 강의하러 갔다. 점심을 들며 노조 관계자에게 물었다. 요즘 노동자들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이냐고. 그러자 노조관계자가 말했다.
“주차장 문제죠. 다들 차를 갖고 오는데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그날로 그는 노동운동을 접었다. 그리고 지금은 벤처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숨가쁜 시대의 변화속에서 사람들은 시대의 속도만큼 빠른 속도로 달라진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연주 KBS 사장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학생들의 애독서였던 몇 권의 책을 언급하며 소감을 말했다.
그 소감이라는 것이 그 책을 처음 읽던 대학 1학년때 내 느낌과 똑같아 놀랐다. 순수하고 순진한 1970년대 열혈 대학생의 정서가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책들은 박정희 독재정권이라는 특수 상황 아래 읽혀지고 팔렸던 책이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데 감이 빨랐던 이들은 이미 외국에서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들을 유독 한국 대학생들이 신주 모시듯 읽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정연주 KBS 사장도 그렇다. 화려한 시장경제와 신(新)자유주의 물결 속에서도 꼿꼿한 이데올로그로 남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닌 약자에 대한 배려, 분배의 정의, 북한에 대한 심정적 기울임이 그대로 있다.
이처럼 두 인물을 보면 1970년대 후반 대학 초년생인 내가 본 선배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자, 통일 한국을 이루자고 목청을 돋구던 그 열혈청년이 그대로 나이만 먹어 우리 앞에 나타난 셈이다.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서 또 한사람은 KBS의 사장으로서. 이 자체가 엄청난 ‘눈에 보이는 개혁’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고전중이다. 소극적인 사람은 ‘왠지 요즘 기분이 언짢다’ ‘어딜 가건 세상이 어수선하다’고 표현하고 적극적인 이들은 ‘이민가겠다’ ‘도저히 못 참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경선의 기적’처럼 그의 집권 능력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정연주 KBS 사장도 두 아들의 병역문제로 편치 않은 상황 속에 강력한 의지로 KBS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KBS의 어제에 대한 자아비판을 시작으로 한 ‘미디어 포커스’와 제1라디오의 뉴스전문채널 개편, 노무현 대통령의 주례 라디오연설, 이른바 운동권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는 한국 인물현대사 등 그의 속내가 담긴 프로그램들이 하나하나 보따리를 풀고 있다. 진정한 공영방송의 틀을 세우겠다고 한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말로 세상이 ‘개혁’되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정연주 KBS사장이 똑같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국민은, 시청자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점이다.
국민은 언론과의 전쟁도, 이데올로기로 도배된 방송도 원치 않는다. 국민이자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된 사회 속에 풍요로운 삶’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TV도 그렇다. 국민들은 TV를 통해 70~80년대 한국 대학생들처럼 의식화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 수준높은 교양프로그램과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오락 프로그램, 그리고 치우침없는 정직한 뉴스를 원한다.
이런 국민을 ‘개혁대상’으로 생각하거나 ‘역사의식’이 실종된 천민자본주의 추종자거나, 신경제에 세뇌당한 피압박민족, 강대국의 집요한 분단의 논리의 희생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국민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무식하지도 아마추어도 아니다.
이미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으로 이력이 붙은 대한민국 국민은 ‘70~80년대 정서’로부터 벗어난지 오래이다. 만만치 않은 삶의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다. 열혈청년들의 단순한 열정을 참을 수 없고 넘치는 감성을 받아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 대통령은 예측가능한 현실적인 비전의 청사진을 펼쳐주길 원하고 방송은 방송답게 ‘미디어의 우등생’이 되기를 요구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정연주 KBS사장이 시대착오적 인물과 사고를 갖고 있다고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국민은 전방에 있고 두 인물은 후방에 있다. 자기동네를 고집하며 뺑뺑 그 자리에서 돌지 말고 더 넓은 세계를 공부하고 더 유연해지고 좀더 현실적이 되었으면 한다. 즉 다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개혁적인 두 인물이 가장 원치 않는 방향으로 세상이 움직일 것이다. ‘그래도 박정희 때가 좋았어’ ‘전두환이 경제 하나는 끝내줬잖아’ ‘아무리 그래도 KBS는 아무개 사장 있을 때가 최고였어’ ‘딴 건 몰라도 그때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았어?’라는 말들이다.
독재자에게 향수를 느끼고, 방송을 도구화했던 사람이 그리운 세상을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반개혁’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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