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의 시간

2

“네 말은 즉, 바둑으로 전인교육을 하자는 뜻?”
나는 이형에게 넌지시 물었다.

“흠, 전인교육이라… 인간이 지닌 모든 자질을 전면적으로, 조화롭게 육성하는 교육으로 바둑을 활용하잔 뜻이겠지? 마치 바둑으로 튼튼하고 훌륭한 피조물을 만드는 것처럼. 물론 우리가 조물주란 얘기는 아니지만, 바둑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인간의 바람직한 지향점을 찾는 일을.”

그의 말투는 꼭 아랫사람을 훈시하는 듯해서 나로선 약간 거부감이 든다. 그렇지만 내 빈곤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철학의 세계에 손을 내미는 데엔 그만한 친구가 또 없을 거였다.

“난 말이야, 바둑의 세계에 있던 날들을 잊지 못해.”
독백에 가까운 이형의 말은 내 과거까지도 불러오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혹자로부터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어. 그때 난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 바둑에만 매달린 나의 이십여 년이 부정되었다는 사실이. 어쨌든 나는 바둑 프로를 지망했었고, 아직도 그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 중필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난 나만의 세계를 확립하지 못했어. 바둑에만 너무 매달리다 보니까 자연스러운 사회적 활동이 부재했던 탓이야. 어릴 적 친구들 - 그마저도 부를 수 없겠지 - 또래들은 그들 나름대로 학창시절을 견디고 드넓은 도심에 나갈 준비를 하는 참에, 나는 매일매일 같은 장소에서 당장 목숨처럼 주어진 한판 승부에 몰두했던 시절이었어. 아무것도 몰랐기에 도전할 수 있었고, 막상 결과를 받아들일 때쯤엔 뒤늦게 세상을 알아가야만 했어. 완고한 바둑의 세계에서 진짜 세상으로, 마치 부표처럼 떠밀리듯 나온 중필이 너와 나를 수식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는 '미완성'일 테지.”
그의 진심이 담긴 말을 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마냥 끄덕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듯이.

“내친김에 하나만 더 물어볼게. 가령 네가 딱 하루 동안만 사람들에게 바둑을 가르친다고 가정해보자. 넌 어떻게 할래?”
이형이 불쑥 질문했다.

“음, 아마도 바둑의 기술적인 부분들이나 포석, 정석, 맥 같은 가장 기초부터 알려줄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넌 아주 착실한 애야.”
이형의 빈정거리는 능력에, 우리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나라면 말이지… '상상력과 영감, 직관을 통찰하는 바둑'을 전수할 거야. 무엇보다도 ‘마음가짐’에 관해서 내 하루 동안의 시간을 기회로 사용하고 싶어. 일테면 '하루'란 백수에게는 마냥 길기만 한, 타성의 하루일지 몰라. 반면에 시간을 재산처럼 귀히 사용하는 이들에겐 아쉽기만 한 '오늘'이 아닐까?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저마다 비슷하게 보이나, 실은 다른 속도를 내며 달리는, 멈추지 않는 마차와도 같아. 바둑을 둘 때를 떠올려 봐. 시간의 흐름 같은 건 잊어버리게 되잖아. 그래! 바둑을 두고 있는 하루는 시간이 참 빨리도 가더라. 어때, 하루 만에 바둑의 기술을 가르치기엔 너무 짧지? 그렇다면 ‘마음가짐’이 대두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은 평온하여 반상에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고’ 즉 반전무인의 자세를 길러주는 일이 바둑교육의 가장 빠른 길이라고 난 확신해.”
이형의 말하기는 거침이 없었다.

“정말 모두가 공감할 만한 바둑의 특성이 뭘까?”
과묵한 나에게 그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투혼의 승부사 조치훈은 이렇게 말했던가. 깊고 고독한 내면세계의 반영, 바둑이란 세계에서 만난 내 유일한 친구, 이형.

“바둑은 ‘자유의 게임’이야.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반칙을 제외하고 어디든지 둘 수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책임 또한 따르게 돼. 왜냐고? 전쟁이니까. 승리하기 위해서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는, 확실한 목적이 있는 대결이지. 한마디로 바둑은 개인의 기량을 자유롭게 시험하는 유희. 반상盤上에서 놓이는 모든 수는 비록 나란 대국자의 기물일 뿐이지만, 어쩌면 '삶'이라는 각각의 반상에서 개개인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아.”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힐긋 이형의 표정을 살폈다.

3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 이형, 그러나 지금 내가 아는 이형의 모습은 가까스로 그 시절을 통과한, 사회인이 되어 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문구 '日新又日新' 그대로 날마다 새롭게 노력한 덕분일까. 나 역시 그 시절로부터 정신없이 달려온 늦은 청년의 모습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단박에 그 시절을 불러오는 그와 나의 대화들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를 아름답게 떠올릴 수 있는 오늘은 값진 것이므로. 온전한 우리들의 그 시간을 오늘 기꺼이 문 열고 들어가면, 여전히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는 강의실의 이형과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