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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과 맥주병 |
| 글쓴이 음모자 조회 722 |
작성일 2003-03-03 오후 4:3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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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손님이 뜸해진 시간의 틈을, 여자친구가 타준 따스한 차한잔의
여유로 채워줍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보내는 시간중에 문득 몇달전에 처음 만난
노인분이 떠오릅니다.
새벽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한잔 생각에 맥주몇병 사올
요량으로 편으점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 그때.
느릿한 걸음. 아니 느릿하다고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한발 한발
내딛는것이 너무도 힘겨워 보이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쪽 어깨를 표나게 짓누르는 검정색 가방, 한손엔 지팡이.
볼이 움푹 들어간 초췌하고 야윈 얼굴과 듬성듬성 다듬어지지
않은 까칠한 수염 그리고 남루한 옷차림.
맥주를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에도 얼마의 길밖에 걸어내지 못한
노인은, 잠시 멈추어 검정 가방에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주워담고
계시더군요.
그것은 병이더군요. 주택가 골목에 놓여져 있는 주인없는 빈병을
열병, 스무병이면 가득찰 가방에 넣고 계셨습니다.
저걸 팔면 돈천원이나 될까..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도 힘겨운 노인의 모습에 슬그머니 다가섰습니다.
"할아버지 병 많이 모으셨어요?"
난데없는 저의 질문에도 그리 놀라진 않으시고 앞니도 몇개없는
이를 슬며시 드러내며 조금은 수줍은듯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할아버지 요 근처가 저희집인데 같이 가실래요? 병 많거든요"
가방에 가득차게 담아 드리고도 많이 남아있는 빈병에 아쉬워
하는 얼굴을 하는 노인에게, 둘만의 비밀 장소를 약속하고 새벽
에 매일 가져가시라고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뒤로 한달여를 꾸준히 놓아두고 노인은 새벽에 가져가시고..
덕분에 제 맥주 주량은 늘어만 가더군요.
그런데 어느날 부터 맥주병을 담은 봉지가 하루이틀 쌓여만
갔습니다.
비오는 날에도 없어지던 병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는데도 노인은 나타나지 않더군요.
....
노인의 소식은 지금도 모릅니다.
아니 알고싶지 않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인생이 한판의 바둑이라면 노인으로선 마지막 공배만 채우는
일만 남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어느 수순에서 분명 잘못이 있었으리라고 나름대로 헛
짐작을 해보지만, 노인 자신은 후회없는 한판이었노라고 답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선하게 웃던 노인의 눈동자에서 비록 좋은 내용은 아니
었지만 암수와 비수없이 정수는 두었으리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중반으로 치닫는 제 인생대국은 과연 어떤 끝맺음을 하게 될지..
비루한 모습이라도 바른수를 두려고 노력은 했다는 말은 하고
싶지만, 이기고 싶은 욕심이 늘 앞서는 까닭에 갈등하곤 합니다.
모아놓은 맥주병을 아침에 가게집에서 계란한판과 바꾸고,
입에서 풍기는 계란냄새를 지워주려는지 더욱 짙게 향을 내는
차잔을 앞에두며 하릴없는 망상을 해 봅니다.
다시 노인을 뵐수 있으리란 희망 때문일까요?
혹시 모르죠. 내일이라도 당장 노인께서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내 인생의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외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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