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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과 개방. |
| 글쓴이 새벽21 조회 3460 |
작성일 2002-08-20 오전 8: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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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쇄국 정책을 접고 외국에 문호를 연 것은 1876년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의 산물로 기록돼 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과 원산 인천항을 일본에 개항했고 이후 서구 열강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이 늘면서 20년간 전국 9개항을 열어 대외통상을 허용하게 된다.
개항기 교역은 이른바 ‘미면(米綿)거래’가 대종을 차지해 조선의 농촌 경제가 급속히 붕괴되는 현상을 초래한 것으로 분석됐다. 미면거래는 쌀을 비롯한 농산물을 수출하고 면포 면사 등 면제품을 주로 수입하는 농공분업 형태의 교역으로 농산물 수출국의 대외 종속을 심화시키는 저개발형 통상 구조다. 개항기 대일 교역은 사실 거래라기보다 수탈에 가까웠다. 근대적인 수교통상 경험과 준비가 전무했고 관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마저 부족했던 탓에 조선은 관세 부과까지 포기한 무방비 상태로 국내시장을 열었다.
조선에서 전통적인 가내 부업으로 생산되던 무명(토포)은 기계로 짠 목면과 광목 등 일본산 면제품과 영국산 옥양목에 빠르게 밀려났고 반제품 상태인 일본산 방적사 수입도 급증했다. 일일이 손으로 짠 전통 무명은 기계식 방적사를 이용,면직기로 대량 생산된 외래 면포와 가격 및 품질면에서 경쟁이 될 수 없었다.
일본은 조선 쌀을 대량으로 반출하면서도 면제품을 비롯한 공산품을 내다 팔아 무역흑자를 기록한 반면 조선은 심각한 무역역조 속에 식량 부족으로 쌀값이 급등했다. 당시 개항은 어쩔 수 없는 대세였다고 하지만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다가온 문호 개방이 초래한 일본의 수탈과 무역 불균형은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조선인 자본에 의한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이 설립된 것은 개항 40여년 후인 1919년이었다.
2004년 쌀 시장개방 재협상을 포함한 뉴라운드 협상 시한이 1년여 앞으로 닥쳤다. 그런데도 아직 농업부문 개방을 공론화하는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국내 사정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120여년 전의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재계 지도자나 경제 전문가들이 농업 개방 공론화를 몇 차례 시도한 적이 있지만 농민단체의 거센 반발에 밀려 수면 아래로 잠복했고 김대중 정부는 골치 아픈 문제를 차기 정부로 미루겠다는 심산인지 눈치만 살피고 있다. 한·중 마늘 협상 파문은 국내 마늘 농가에 큰 피해를 주었을 뿐 아니라 농업정책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켜 개방 공론화와 농업 구조조정까지 지연시키게 만든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뉴라운드 협상이 관세 부과를 전제로,쌀을 포함한 농산물을 수입 개방하는 방향으로 결말을 보게 될 때 농촌 경제는 개항기 못지않은 피해에 직면할 우려가 높다. 개항기와는 달리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고 통상외교 능력도 증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추가 개방에 대비한 농업구조조정과 농촌 경제 지원대책 등의 준비는 여전히 미흡하기 짝이 없다.
관세화를 전제로 개방해도 국내 쌀값이 외국산에 비해 3∼4배나 비싼 현실에서 차액을 모두 관세로 흡수하기는 어렵고 일단 높게 매긴 관세는 연차별로 낮추어야할 의무가 따른다. 농업생산 대국인 중국과 미국이 한국의 쌀시장 개방을 기다리며 이미 우량 종자나 경작지 확보에 나섰다는 소식도 들린다.
뉴라운드에 임하는 협상 원칙은 우선 쌀시장 추가 개방을 늦춰 충분한 유예기간을 확보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므로 대안을 마련하고 이에 따른 국내 대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한다. 협상의 대세는 관세화를 전제로 한 개방이다. 우리나라는 1993년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감산’을 약속하고 10년간 쌀시장 개방 유예를 얻어냈으나 이 약속마저 지키지 못해 개방 압력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 12일 저녁 충남 안면도에서 열린 전국농업경영인대회에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나란히 참석,농업정책에 대한 소신을 밝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두 후보는 한편으로 현 정부의 농정 실패를 지적하면서 농가부채 이자인하와 적극적인 농정개발을 다짐하는 등 덕담을 하는 데 그쳤다. 일부 농민들의 항의로 분위기가 썩 좋지는 못했다고 들었지만 감산과 작목 전환 등 구조조정을 통한 농업의 활로를 제시하거나 개방 공론화를 언급하려는 의지가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정치권이 선거만을 의식해 막상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사이 뉴라운드 협상시한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개방은 논의를 회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개방을 공론화하고 농촌 경제를 지탱할 대책을 수립,시행에 나서야 한다.
김성기 논설위원 kimsong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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