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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반상전쟁을 펼친 애증의 라이벌 조훈현 9단(오른쪽)과 서봉수 9단. 전성기인 1980년대 종로 한국기원 인근 탑골공원에서 어느 봄날 찍은 사진. |
“이미 주랑(周郞)을 낳았거든 공명(孔明)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
이 말은, 삼국지에서 오의 맹장 주유가 이승을 하직하면서 촉의 제갈공명이란 영웅과 같은 시대 같은 땅을 밟게 한 하늘을 원망하며 탄식한 말이다.
숙명과도 같은 라이벌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동시대에 나란히 태어나 나란히 활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천운이다. 105리를 뛰는 마라톤 레이스도 혼자 독주하기보다는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는 게 힘도 덜 들고 기록경신에도 유리하다. 그런 의미에서 53년생 동갑내기인 조훈현과 서봉수는 한국바둑사에 길이 남을 영원한 라이벌로 숱한 명승부를 남겼다.
바둑엘리트와 야전사령관
우리말보다 바둑을 더 먼저 배웠다는 조훈현. 세계에서 제일 어린 나이(62년, 만9세)로 프로기사가 된 천재. 63년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가 촉망받는 신예기사로 활약하다가 72년 군복무차 귀국한 조훈현을 엘리트과정을 거친 바둑육사생도에 비유한다면, 서봉수는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사령관이라고 할수 있다. 서봉수가 열여섯 살 중3 무렵 바둑돌을 처음 만질 때 동갑내기인 조훈현은 이미 9단들도 무서워 하는 쟁쟁한 차세대 선두주자로 촉망받고 있었다. 만인이 인정하는 바둑계 황태자였다.
그렇지만 서봉수는 바둑을 배운 지 1년 만에 1급이 되었고 입단(70년)한 지 채 2년이 안돼 명인전에서 한국바둑계의 거목 조남철 8단(당시)을 3:1로 물리치고 명인에 올라 일약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시 최저단(2단), 최연소(19세), 입단 후 최단기간(1년 8개월 만)에 타이틀을 획득한 이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을 두고 바둑계에서는 “사람이 개를 문 사건”으로 비유했고, 타이틀을 뺏긴 조남철 8단조차 “헛참, 서봉수의 단위가 3단만 되었더라도…”라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 62년 만9세, 세계 최연소로 한국기원 프로기사가 된 천재소년 조훈현은 이듬해 일본에 바둑유학을 갔다가 72년 군복무차 귀국했다. 이때 한국바둑의 판세는 조남철-김인으로 이어오던 흐름이 '19세, 2단'에 지나지 않은 신예 서봉수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소용돌이치는 형국이었다. 서봉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듣보잡'이나 다름없는 무명의 존재였지만 조남철-김인으로 대표되는 1세대를 밀어내고 한국바둑 2세대를 이끌 선두주자로 단숨에 떠올랐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일찍이 '바둑황태자'로 인정받은 조훈현이 돌아온 것이다. 당연히 조훈현의 한국바둑 접수는 시간문제로 여겼다.
동갑내기의 스파링, 연습바둑의 허허실실
무수히 조훈현의 실제 출생은 52년이었으나 호적에는 1년 늦은 53년에 올린 탓에 대외적으로는 서봉수와 동갑내기로 불렸다. 같은 또래지만 황태자로 엘리트의 길만 걸어온 조훈현과 들판의 잡초처럼 일어선 서봉수는 바둑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명성으로나 실력으로나 타고난 기재 면에서나, 게다가 일본의 선진바둑을 경험하고 돌아온 조훈현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이때 서봉수가 취한 선택이 연습바둑이었다. 틈만 나면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조훈현의 옷소매를 붙들고 연습바둑을 청했다. 명색 프로가 그냥 두기엔 심심하니 소소한 내기를 걸고 한 대국에서 서봉수는 무수히 얻어터졌다. 그러면서 조훈현의 장점을 흡수하고 단점을 간파했다. 말하면 스파링 파트너를 자처해 곧 닥칠 둘의 정면대결에 대비한 것이다. "아이쿠, 이거 허구한 날 명인의 체면이 말이 아니네~" 주변 동료기사들의 놀림 따위는 귓등으로 흘렸다. 연습과 실전은 다른 것, 진정한 자존심이란 최후에 웃을 그날을 위해 세우는 법. 서봉수의 실전적 기풍이 그러하듯 철저한 실용주의가 그의 승부철학이었다. (사진은 조훈현이 귀국 직후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서봉수와 연습바둑을 둘 때의 모습)
아직도 ‘조-서’전은 끝나지 않았다
중천의 해는 둘일 수 없다. 한국 땅에 서봉수라는 혜성이 나타나 한국바둑의 세대교체를 외칠 때 바다건너 일본에서 또 하나의 혜성, 조훈현이 날아왔고 마침내 둘은 정면으로 충돌한다.
70년대 중반부터 두 사람은 눈만 뜨면 일합을 겨루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조훈현 9단이 프로기사로서 세계최초로 비례대표 의원이 되어 국회에 들어가면서 일시 멈추기까지 40여년 간 이어졌다. 국회의원은 겸직이 허용되지 않기에 조9단은 한국기원에 4년간 프로기사 휴직계를 내고 잠시 승부세계를 떠난 상태지만, 아마, 필시 복귀한 다음에도 두 사람은 끝장대결을 계속해서 펼칠 것이다.
지금까지(2016년 7월까지) 싸운 공식대국만도 372전이다. 조훈현 9단이 252승 120패로 약 7:3의 비율로 앞서 있다. 이 가운데 타이틀을 놓고 최종무대에서 도전기 혹은 결승기를 벌인 회수는 모두 72회. 두 사람의 전성기인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말까지 15여년에 집중된 타이틀매치 회수지만, 이를 40년 전체평균으로 내도 1년에 두 차례 가까이 타이틀전을 꾸준히 펼쳤다는 얘기다. 타이틀매치에서도 58승 14패로 역시 조9단이 압도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 정도 격차면, 전적만으로 미루어볼 때 일진일퇴를 거듭한 ‘라이벌’이었다 선뜻 칭하긴 그렇다. 그런데도 모든 이가 기꺼이 두 사람을 ‘숙명의 라이벌’로 부르는 까닭은, 이들은 70∼80년대 한국바둑을 대표한 기사였거니와 서봉수 9단이 중요한 고빗길마다 매복하고 있다가 조훈현 9단의 발목을 잡아챈 유일무이한 대항마였기 때문이다. 대체적인 승부 결과는 조훈현 쪽이 약 7:3의 비율로 앞섰지만 이처럼 결정적인 대목에서마다 한방씩 터뜨려 주는 서봉수의 근성과 독기가 대단했기에 7:3으로 밀리면서도 진정한 라이벌로 자리할 수 있었다.
조훈현이 해안이라면 서봉수는 그 해안을 향해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였다. 터지고 또 얻어 터지면서 불가사의하게 그는 하나씩 하나씩 조훈현의 비기(秘技)를 훔쳤고, 그리하여 오뚝이처럼 번번이 일어섰다. 그런 연유로 서봉수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조훈현은 내 스승이었다"고.
상대에게 배우기는 조훈현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처음으로 패배의 쓰린 맛을 안겨준 장본인이 바로 서봉수였다. 귀국 2년 후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닥뜨린 최초의 도전기가 제6기 명인전(74년)이었다. 평소 연습바둑에서 번번이 나가떨어지던 서봉수였기에 당연히 바둑계의 예상은 메이저무대인 일본에서 활약하다 돌아온 조훈현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일본의 기예가 듬뿍 배인 '단무지 바둑'이 서봉수의 저릿저릿하면서도 끈적끈적한 한국식 '고추장 바둑'에 3:1로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공은 둥글고 따라서 승부도 알 수도 없다는 말, 9회말이 끝나야 승부도 비로소 끝나는 것이란 말을 실감케했다. 객관적인 실력을 떠나 승부사의 정신이 승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종종 두던 두 사람의 연습바둑이 자취를 감췄다. 연습바둑은커녕 두 사람은 반외에서도 철저히 서로를 의식하고 외면했다.
▲ 양웅의 첫 타이틀매치였던 1974년 제6기 명인전 도전5번기. 7월3일 서울 대원호텔에서 둔 도전4국에서 명인 서봉수가 조훈현을 꺾고 3대1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내심 충격을 받은 조훈현은 이때부터 이를 악물었고 두 사람의 자존심과 명운을 건 필생의 승부가 펼쳐졌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전에는 제한시간 5시간이나 3시간짜리 도전기에서는 점심시간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바둑판 앞에서 사력을 다한 상대일지라도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두 대국자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데(이럴 때 보통 선후배이거나 동료기사이기에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밥을 먹기 예사이건만), 두 사람은 식사를 해도 서로 정면에 마주앉는 법이 없었고 말조차 섞기 꺼려했다. 혹 동료기사들과 포거를 치거나 게임을 해도 둘 다 끼는 일이 드물었고 어쩌다 합석을 하게 될라치면 어느 한쪽이 슬며시 자리를 떴다. 웬만해선 복기도 없다. 묻고 싶은 부분이 있어도 입밖으로 드러내어 묻지 않았다. 자존심이자 오기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80년대말 운당여관에서 도전기를 두던 중 조훈현이 장고에 돌입하자 서봉수가 주간지를 면전에서 뒤적였다. 대국매너를 따지자면 프로바둑에서, 그것도 팬들이 관심있게 지켜보는 도전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이 바둑에 앞선 대국에서 서봉수가 장고할 때 조훈현이 잠시 바둑책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신경전. 맞수의 승부에서나 볼 수 있는 재미다.
지금도 서봉수는 이창호는 무서워 해도 조훈현은 안 무서워 한다. 당신이 장부(丈夫)면 나도 그에 못지 않은 대장부(大丈夫)라는 호기와 자존심이 조훈현의 융단폭격에서 견뎌내게 했다. 조훈현은 80년, 82년, 86년 세 차례나 국내 전 타이틀을 싹쓸이한 전인미답의 '전관왕'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조훈현의 전관왕 등극이 결정되는 마지막 관문엔 언제나 서봉수가 서 있었고 또한 전관 왕국의 몰락도 서봉수로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조훈현에게 서봉수는 시작이요 끝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장면은 86년 제30기 국수전 도전기에서 일본에 유학하지 않은 순국산, 토종기사였던 서봉수가 맞수 조훈현을 꺾고 처음으로 국수에 오른 순간일 터이다. 한국바둑을 상징하는 국수(國手)전은 전통적으로 일본 유학파들의 독무대였다. 조남철에서 김인으로, 그리고 잠시 윤기현-하찬석을 거쳐 조훈현으로 이어지면서 29년간 순국산 기사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더욱이 76년부터 85년까지 조훈현은 조남철이 세운 국수 9기 연속제패 기록을 뛰어넘어 10연패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때까지 국수전은 순국산 기사에게 금지구역이었고, 더군다나 상대는 천하의 조훈현이었다. 이같은 철옹성을 단숨에 뛰어넘은 기사가 서봉수였다. 86년 국수전 도전5번기에서 조훈현을 3:0으로 몰아붙여 마침내 해외(일본) 유학을 하지 않은 기사로는 처음으로 국수에 올랐다. 7년간 국수전 연속 도전 끝에 기어이 거둔 6전7기, 끈기의 승리이기도 했다. <바둑가이드>
▲ 순국산 국수가 탄생하던 순간. 1987년 제30기 국수전 도전5번기 3국 종국 장면.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당여관에서 두었다. 조훈현은 항상 서봉수를 마지막으로 제압하면서 천하통일을 이루었고, 세번에 걸쳐 이룩한 전관왕이 무너질 때도 선봉에 번번이 서봉수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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