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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대결 이야기④ 5천만원짜리 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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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대결 이야기④ 5천만원짜리 반집
| 정용진 2017-03-09 오후 00:42 [프린트｜스크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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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는 차라리 웃음만...승부의 고비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반집 차로 번번이 분루를 삼킨 스승은 종내 허망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최정상 무대인 도전기나, 도전기 문턱인 도전자결정전에서 마주치는 상대는 라이벌 서봉수에서 제자 이창호로 바뀌어 있었다. 사진은 제30기 왕위전 도전자결정전. |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의 쇼트트랙이 선보인 비장의 카드는 ‘오른발 밀어넣기’ 기술이었다. 당시 남자 1000미터 결승과 여자 1000미터 결승에서 보여준 김동성과 전이경의 극적인 역전승은 IMF한파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을 준 값진 승리였다. 결승선을 앞두고 오른발을 쭉 뻗어 그야말로 스케이트 날 반개 차이로 금메달을 낚아채는 이 ‘발 밀어넣기’ 기술은 바둑으로 치면 짜릿한 반집승부에 해당한다.
육상에서는 가슴, 쇼트트랙에서는 스케이트날, 경마에서도 ‘코차이’란 저릿저릿한 반집승부가 있다. 경주마의 코가 결승선에 걸치는 순위에 따라 승부가 가려지는 것을 이렇게 말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기수가 고삐를 당기느냐 늦추느냐의 기술에 따라 명암이 갈리기도 한다.
바둑의 반집승부를 사진판독한다면 경마의 코차이처럼 몇백분의 일, 몇천분의 일 차이로 결정나는 레이스일 것이다. 바둑에서 “한집은 땅을 보고 통곡하고 반집은 하늘을 우러러 원망한다”는 말이 있다. 한집까지는 자신의 실력이지만 반집은 인력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하늘의 뜻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잠시 바둑의 ‘반집’에 대해 의아해하실 독자를 위해 부연설명-.
바둑은 먼저 두는 흑쪽이 유리하기 때문에 6집반을 백에게 주는(한일 룰, 중국은 7집반) 덤제도를 만들었다. 6집은 이해하겠는데 그럼 반집은 또 뭔가. 반(1/2)집이란 바둑판 위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수치지만 무승부를 예방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반집이 왔다갔다 하는 미세한 바둑을 일컬어 ‘눈터지는 계가바둑’이란 재미있는 표현을 쓴다. 오죽 빡빡했으면 눈이 다 터질 지경이겠는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제의 반집승부’
이창호9단은 ‘반집의 승부사’로 불린다. 초반 포석단계에서부터 반집까지 추리해내는 그의 계산력은, 오죽했으면 ‘신산(神算)’이란 별호를 다 붙였을까. 이9단과 대국할 때는 누구나 일단 보안경을 하나씩 준비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눈터지는 반집승부에 자칫 시력을 버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둑계에서 시력을 가장 많이 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스승인 조훈현 9단이다.
사제대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반집’은 98년 2월9일에 두었던 제9기 기성전 도전7번기 5국이다.
오후10시, 한국기원 특별대국실.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빼곡히 계가한 바둑판을 사이에 한 채 10분 가까이 말을 잃고 있었다.
2:2에서 맞은 제9기 기성전 도전5번기 최종국. 백 40집, 흑 45집. 덤 5집반(당시 룰)을 공제하고 나니 백(이창호)의 반집승.
▲ 1998년 2월9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벌어졌던 제9기 기성전 도전7국(최종국) 종국 장면. 결론은 반집. 또 반집이다.
두 기사의 얼굴은 한껏 풍무질을 해댄 화로처럼 벌겋게 달아있다. 초반 2연승을 거두고도 내리 3연패로 대역전 패배를 당한 조훈현 9단이 참람한 표정으로 마침내 천년의 고독보다 무거운 정적을 깬다. “결국은 뒷탈이 나네요.” 곁에서 지켜보던 김인 9단이 안쓰러운 얼굴로 돌아서며 혼잣말을 툭 던진다. “하필 반집이라…. 조국수, 몸살나게 생겼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초반 2연승으로 기선제압을 해놓고도 추격을 허용하여 2-3의 대역전극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종 5국은 반집패. 결정적일 때마다 번번이 반집이라니. 거듭되는 운명의 장난 앞에 조9단도 어이없었던지 공배를 메우고 계가를 하는 동안 허탈웃음을 연신 지어 보였고, 이 소식을 실은 월간『바둑』 98년 3월호는 ‘차라리 웃고만 반집'이란 헤드라인을 붙였다.
▼ [장면도] 제7기 기성전 도전7번기 5국
백 이창호 9단 (기성)
흑 조훈현 9단 (도전자)
<1998. 2. 9, 268수 끝, 백 반집승>
<장면도>는 조훈현 9단이 스스로 ‘5천만원짜리 반집'이라며 무척 아파했던 한 판이다. 98년 당시 기성전의 우승상금이 1천800만원이었으니 만약 이 판을 이기고 기성에 올랐다면 다음해 도전기에 타이틀 보유자로서 자동출전하게 될 것이고 그때의 상금에 대국료까지 족히 5천만원쯤의 가치를 지닌 판이었다는 얘기다. 그만큼 뼈아팠다는 다른 표현이다.
천하의 성인군자도 제 겨드랑이 털 세번만 뽑으면 버럭 화를 낸다고 했다. 93년 2월 제32기 최고위전 도전1국에서 제자를 상대로 흑 반집승을 거둔 것을 끝으로 이때까지 반집 분루만 11연속째. 96년 한해만 반집패를 당하지 않았을 뿐 89년부터 매년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딱 반집으로 무너져 왔으니 아무리 스승의 입장이라지만 환장할밖에.
조9단은 나중에 이 판을 검토하며 <장면도>의 흑1을 패착으로 지목했다. 백4가 선수여서(흑5를 두지 않으면 백A의 끊음이 성립된다) 후수가 되는 바람에 백에게 6의 요처를 빼앗겼다. 그리고 흑1은 그 자체로 6의 곳보다 작았다.
▼ <1도>
<1도> 흑1로 두어야 했다. 백이 2로 받아주면 흑3이 다음으로 크다. 다음 백이 안받으면 흑A로 찌르고 백B 교환하는 것이 선수 2집 끝내기. 나중에 공배가 메워지면 백은 C에 한수 더 놓아야 한다.
▼ <2도>
만약 <2도> 흑1에 백이 손을 빼면 흑3,5로 두는 것이 나중에 아래의 <3도>처럼 흑1로 치중하는 수도 있어 어떻게든 반집은 이겼을 것이라고, 조9단은 크게 아쉬워했다.
▼ <3도>
<3도> 흑1의 치중에 백A의 패는 흑이 팻감이 많다. 따라서 백은 B로 잇고 나중에 C의 곳을 한수 더 보강해야 한다.
“허참, 그다지 어려운 곳도 아니었는데….”
조9단의 탄식이 동굴 속의 울림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 <조훈현과의 대화, 이광구 저 참조>
조9단이 제자에게 ‘반집 콤플렉스’에 걸린 것은 89년 1월로 거슬러올라간다. 경악스럽게도 예상보다 10년은 빨리 제자가 도전해왔고, 그 첫합을 겨루던 제28기 최고위전 도전3국에서 제자는 2연패 뒤에 흑 반집승으로 보은(報恩)의 일국을 치른다. 스승에게 이긴 첫 승점이 반집승이었던 것. 이어 이듬해 2년 연속 도전에 나선 90년 제29기 최고위전에서는 2:2까지 박빙의 승부 끝에 최종5국에서 또다시 흑 반집승을 거두며 스승의 타이틀을 첫 접수하는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을 일으켰다.
94년 제38기 국수전 도전5국에서의 반집패도 아팠다. 한국기원이 관철동에서 홍익동으로 이전하고 벌인 첫 도전기에서 조9단은 먼저 2판을 빼앗기고도 열심히 따라붙어 2:2를 만들었으나 밤11시까지 간 마지막 사투에서 흑 반집패를 당했고 결국 이때 입은 내상으로 한때 무관으로까지 전락하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또다시 이창호의 ‘2연패 뒤 3연승’ 역전방어. 결론은 얄밉게도 반집 차. 이때까지 사제가 벌인 도전기에서 먼저 2연패를 당하고서도 내리 3연승으로 결과를 뒤집은 대역전 기록은 모두 다섯번 있었는데, 이 중 4번이 제자의 뒤집기 승이었다. (스승이 딱 한번 이긴 기록은 97년 28기 명인전 도전5번기, 이때 2연패 후 기적 같은 3연승을 올려 6년 만에 명인을 탈환하며 5관왕에 올라선 바 있다.)
‘땡조 뉴스'라는 우스갯소리에서 보듯 나이에 따른 체력과 집중력의 저하가 분명 큰 원인이다. 운명의 반집 앞에 차라리 웃고만 스승에게 제자가 매번 선사하는 이 반집은 바로 세월의 무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조훈현 9단은 화염방사기와 같은 초중반 능기에 견줘 종반이 약했다. 이것이 아킬레스건이었다.
서봉수나 ‘도전5강’ 세력의 도전을 받던 시절엔 실력 차이가 있어 눈터지는 반집싸움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었거니와 종반 승부로 가더라도 당시는 다들 전반적으로 끝내기 실력이 약했을 때였기에 이창호에게 당하는 것처럼 번번이 덜미를 잡히는 따위의 낭패를 겪을 일이 그리 없었다. 그러나 선배들에 비해 계산바둑에 철두철미한 유창혁, 이창호과 같은 후배들은 달랐다. 특히 이창호는 슈퍼컴이었다. 늘 토끼와 거북 경주 같은 결과가 되풀이된 원인은 나이에 따른 체력(집중력) 저하 말고도 종반 계산력에서 밀린 탓이 컸다. <월간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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