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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승이 현역 최고봉에서 채 하산하기도 전,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제자가 정상으로 치닫는 바람에 세계바둑사에 유례를 찾을 길 없는 사제도전기가 연이어 벌어졌다. 사진은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맞대결한 제33기 국수전 도전2국 모습. 1989년 10월5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펼친 이 대국 또한 짙은 어둠이 깔린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언제나 그렇듯 제자는 죄지은 아이마냥 고개를 들지 못했고 스승은 연방 뭔가 안 풀린다는 듯 난감한 몸짓을 보이곤 했다. |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창호가 복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었다. 창호가 내제자로 들어오던 84년은 연구생 1급에서부터 10급까지 등급별로 낙타가 바늘 꿰는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구생의 실력은 프로 빰치는 수준이다. 연구생 상위 클래스의 실력은 정상급 프로와 반반 승부를 다툴 만큼 세다. 아마추어에게도 오픈된 세계대회 통합예선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연구생은 바둑계의 육군사관학교로 불린다. 프로로 가는 엘리트 코스로서 이미 백성호, 서능욱 9단이 수학하던 70년대초부터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내실을 기하지 못하다가 창호가 원생으로 등록하던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니 창호는 바둑육사생도 1기라고 할수 있다. 84년 9월 창호가 연구생으로 등록할 때 판정받은 급수는 연구생 5급. 한해 전 해태배 결승에서 창호를 꺾고 우승한 류시훈은 6급이었고 정현산이 4급이었다. 그 무렵은 김영환이 최강으로 3급이었다. 이들은 모두 프로가 되어 이후 이름을 날렸다.
그해 2월 어깨동무배에서 우승한 창호가 5급 판정을 받았으니 당시 연구생 5급은 아마추어 5단격은 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기력을 가진 창호가 낮에 둔 바둑을 선생 앞에서 제대로 복기를 못했으니 그이는 기가 막힐 수밖에.
복기를 제대로 못하던 천재
일본기원 연구생 시절 그이는 프로의 바둑을 세판이나 동시에 기록하기도 했다. 기보용지에 직접 기록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바둑 한판 따라가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알 것이다. 웬만한 기력과 기억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마지막 수까지 적어내기가 어렵다. 불행하게도 중간에 큰 패싸움이라도 나 흑백 수순이 왔다갔다 하거나 속사포들을 만나 속기로 두어지기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그런 바둑을 한판도 아니고 세판씩이나 동시에 감당해낸 선생(조훈현)이고 보면 불과 며칠 전, 몇 시간 전에 둔 자기 바둑을 되새김질 하는 정도야 식은 죽먹기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한데 복기를 제대로 못해내는 제자를 봤으니...
“내가 공부하던 때는 몇년 전에 둔 바둑도 복기해냈는데…. 그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구먼. 기재(棋才)가 보통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가끔 복기를 제대로 못하는 걸 보면 그게 또 아닌 것 같고….”
그이는 전영선 사범과 가끔 고민스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항시 좀더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겉으로 번쩍이는 것은 실제 큰 재주는 아닐지도 몰라. 누구나 알아보는 재주는 큰 재주일 리 없거든.”
하지만 우려와 달리 창호의 바둑 느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연구생 입문 1년반 만인 85년 말 연구생 중 가장 먼저 1급으로 승급했고 다음해 8월 연구생 입단대회에서 김원과 나란히 입단의 관문을 뚫었다. 당시 11세, 내제자로 입문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바둑판 밖에서는 그토록 어눌하고 느려터진 창호였건만 막상 입단하고 나니 “선생 앞으로 전진!”은 일직선상이었다. 입단 햇병아리인 3단 시절 선생의 최대 라이벌인 서봉수 9단을 무려 여섯번이나 녹다운시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더니 한달음에 선생 면전에까지 칼을 쓰윽 들이밀었다.
▲ 스승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런 게 승부세계 아니냐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색하고 난감하여 그저 웃어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짓는 웃음이다. 제자는 두 눈을 아래로 깐 채 시종 묵묵 모드. 하긴 무슨 표정을, 말을 할 수 있으리. 1988년 12월23일 저녁, 부산 광안리 시사이드호텔에서 가진 제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1국 전야제의 풍경은 이랬다.
너무도 빨리 커버린 제자
바둑사에 전무후무할 사제간의 첫 도전기로 기록될 제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제1국이 치러진 날은 하필이면 88년 12월24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였다. 성탄절 이브에 호텔(대국장) 밖에선 징글벨 가락이 넘쳐났지만 사제는 ‘징그러웠을(?) 것이다. 서먹서먹함을 넘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사제간의 첫 대국은 80수 만에 제자(창호)가 돌을 거둠(불계)으로써 단명국으로 끝났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최고위전 도전기를 벌이는 와중에 창호는 또다시 제24기 패왕전 도전자로 나서 선생과 동시다발로 도전기를 치렀다. 어린 창호가 한 기전에서 도전자가 된 것만으로도 ‘바둑계가 혼절할 일(당시 바둑잡지의 표현)’인데 양 기전에서 도전자로 나서다니…. 창호의 쿠데타는 3:1(최고위전), 3:0(패왕전)으로 진압되긴 했으나 아무리 후하게 잡아주어도 5년 이상 빨리 다가온 제자의 도전에 그이는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게다가 선생과 두 개의 도전기를 마친 89년 여름(8월), 입단 3년차에 불과한 창호가 제18기 KBS바둑왕전에서 김수장 7단(당시)을 물리치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14세, 세계바둑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이었다. 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이의 반응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창호는 제29기 최고위전에서 다시 도전자로 노크하고 나섰고,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놀랍게도 3:2로 선생을 꺾으며 보은(報恩)을 한다. 최고위전은 그이가 귀국해 우승한 첫 타이틀이었다(74년). 선생으로부터 양위받은 첫 타이틀도 하필이면 선생의 생애 첫 타이틀이었던 바로 그 기전이었으니 무서운 업(業)이요 인연의 끈이랄밖에.
당말의 시인 조송(曹松)의 시구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라 했다. 한 장수의 공을 이루려면 만명의 뼈가 마른다.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이 말을 이제는 세계 넘버원이 된 창호에게 해주고 싶다. <바둑가이드>
▲ "나 혼자만으로는 힘들어..." 바둑의 세계화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바둑 일인자였던 조훈현 9단은 이렇게 말하며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여 키웠다. 역시나, 1988년 국제대회인 후지쯔배, 응씨배가 연속 탄생하면서 바둑계는 단숨에 국경의 의미를 희석시켰고, '원투 펀치' 조훈현-이창호 사제를 앞세운 한국은 90년대~2000년대 초까지 무려 세계대회 2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스승이 앞에서 끌고 제자가 뒤를 받친 한국바둑은 무적이었다. 사진은 1996년 2월 제4회 진로배 시상식(상하이)에서 김인 단장(가운데)과 함께 황금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이창호, 조훈현 사제. 제자 이창호를 키운 건 조훈현 9단이 세운 무수한 기록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이 아닐까.
▲ 1989년 10월19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바둑 세계제패 기념축하연을 열었다. 김우중 한국기원 총재가 응씨배를 제패한 조훈현 9단과 부인 정미화 씨에게 우승을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장면. 이때는 남편을 잘 내조해 바둑황제에 오르게 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테지만 정작 정미화 씨의 최대 공로는 내제자 이창호를 받아들여 키운 공이다. '바둑황후' 소리를 들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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