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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정부가 출범하고 1년여쯤, 청와대 기우회인 청석회와 한국여성기우회의 교류전을 다룬 기사에서 착오로 영부인 이름을 잘못 써 경을 칠 뻔했던 문제의 그 1995년 1월호 월간바둑.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시훈 9단이 잘 나갈 때이다. |
바둑기자 시절, 친구들이 내게 모임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면 이렇게 눙치고는 했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느냐?”
물론 바둑잡지사 기자가 청와대에 출입할 일이 있을 리 없다. 청와대에서 바둑대회가 크게 열려 취재요청이 들어온다면 모를까 평생 한번 걸음할 일이 있을지 말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팔자에 없는 그 곳을 두번이나 드나든 일이 생겼으니….
월간｢바둑｣ 95년 1월호의 [확대경 뉴스]를 보면 청와대의 바둑동호회인 청석(靑石)회가 94년 연말에 한국여성기우회와 가진 교류전을 소개하고 있다. ‘청와대 바둑바람’이란 제목을 단 이 기사는 93년 문민(김영삼)정부가 출범한 이후 개혁, 개방의 물결을 타고 청와대에도 청석회 결성을 계기로 바둑바람이 불고 있다고 서두를 연 다음 당시 홍인길 총무수석 비서관을 비롯해 청와대 직원의 3분의 1에 이르는 70여 명이 이 모임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앞서 ‘정치판 바둑판’ 칼럼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바둑과 연관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듯, 군출신 대통령들은 바둑을 좋아하고 제법 둔 반면 민간 대통령들은 거의 두지 못했으며 그런 탓인지 바둑에 대해 대체적으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말한 바 있다(문재인 현 대통령만 빼고).
특히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20대 초반 장택상 의원의 비서관을 지내던 시절 바둑을 두다가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 바둑이나 두어서야 쓰겠나?”라는 꾸중을 크게 듣고 난 뒤부터 바둑돌에 손을 대지 않았고 한다. 이 한마디가 바둑에 대한 인식을 크게 갈라놓았고 이후로 YS 또한 자기 비서관들이 바둑 두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다. “바둑은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다”는 것이 YS의 바둑관이었다.
그런 YS가 수장인 문민정부에서, 그것도 청와대 관료들이 푸른기와 아래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으니 그때 교류전을 취재했던 바둑기자가 청와대에 인 바둑바람을 ‘문민정부의 개혁, 개방 바람’에 비유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것을 보면 YS가 바둑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집권 후엔 상당히 너그러워졌다는 얘기인데, 영부인 손명순 여사도 교류전 뒤에 한국여성기우회원들을 춘추관으로 초대해 환담을 나눴다.
자, 이렇듯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는데, 별일도 없은 듯 보이는데 어째서 ‘바둑 필화사건’을 얘기하는데 뜬금없이 청와대 타령을 하고 앉았느냐고?
물론 다 좋았다. 청석회의 교류전도 좋았고 이를 취재해 보도한 월간｢바둑｣지 기사의 논조도 좋았다. 그런데 그 보도기사의 맨 마지막 한 줄이 문제였다.
‘한편 이날 양상국 7단과 강승희, 김태향 초단의 시범지도대국 및 지도다면기 행사가 함께 열렸으며 특히 여성기우회가 춘추관을 방문, 김옥숙 여사와 환담을 나눴다.’
흐흐, 무엇이 잘 못된 줄 아시겠는가?
흑흑, 영부인의 이름이 바뀐 것이다.
김옥숙 여사는 전(前) 대통령인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 이름이 아닌가.
▲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왼쪽)와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
우째 이런 일이…. 옛날 왕조시대로 치면 국모인 왕비의 이름을 떡하니 뒤바꾸어 활자화해 놓았으니…. 뭐 왕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갈 거까지도 없다. 군사독재시절만 같았어도 최소한 남산행 치도곤감이 아니었을까? ㅡㅡ;; 하여간 문민정부가 탄생하여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독재정권의 강압 분위기에 젖어 살아온 ‘백성’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자빠지는 ‘새가슴’일 수밖에 없다.
전말은 이랬다. 그때 청와대 취재는 월간｢바둑｣ 수석기자인 L기자가 했는데 마침 원고마감과 중국 취재가 겹쳤다. 도리없이 중국 현지에서 부랴부랴 원고를 작성해 팩스로 전송했는데, 다들 편집 일정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교정볼 여유가 없었다. 보긴 봤으되 YS가 취임한 지 1년 남짓 되었는 데도 여전히 ‘손명순’ 이름 석 자보다는 ‘김옥숙’이란 이름에 더 익숙해 있던 탓에 그러려니 하고들 넘어간 것이다. ‘동방삭 숨는 재주도 오탈자만 같지 못하다’는 어느 분 말마따나 버젓이 두 눈 뜨고 놓친 오자인지라 더욱 기가 막혔다.
한국기원에 비상이 걸렸다. 대책회의가 열렸고 이런저런 처방전이 나열됐다. 가장 손쉬운 조치는 배포된 잡지를 전량 회수하는 것. 그러나 영부인 이름 석 자, 단 세 글자 때문에 1~2백 권도 아니고 수만 권의 잡지를 회수한다는 것은 우선 독자들에게 못할 짓이거니와 금전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결단이었다. 목을 내놓을망정 그리는 못할 일이었다.
이때 청와대 교류전의 초청사범이었던 ‘바둑계의 마당발’ 양상국 7단(당시)이 해결사로 나섰다. 일단 청와대를 찾아가 ‘자수’를 한 뒤 동정을 구하자는 전략이었다. 조훈현 9단의 사인 바둑판이 급히 마련되었다. 말하자면 ‘와이로(뇌물?)’였다.
양상국 7단이 앞장서고 한국기원 사무국장과 편집장인 필자가 뒤따랐다. 최종 책임은 데스크(편집장)에게 있는 것. 편집장 노릇을 제대로 못한 죄로 필자는 난생 처음 넘어보는 청와대 문턱을 무거운 바둑판을 낑낑대며 들고 넘어야 했다.
“아니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영부인 존함을 착각하다니…. 이거 우리 홍보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나저나 몰랐다면 모르지만 안 이상 이걸 어떻게 한다…. 어려운 기원 형편에 잡지를 회수하랄 수도 없고…,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사정을 듣고 난 청와대 비서관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바둑 애호가이자 청석회 열성 멤버였던 그는 오히려 걱정을 해줬다.
결론은 손명순 여사의 이름을 스티커로 찍어 문제가 된 부분에 붙이기로 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선의 성의는 보여 놓아야 혹여 나중에 높은 양반들에게 ‘발각’되더라도 ‘임기응변’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잡지를 배포하는 총판의 도움을 받아 전국 서점에 협조공문과 스티커를 급송하기는 했으나 서점주인이 귀찮은 일을 기꺼이 해주리라 기대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방방곡곡 전국에 산재한 서점을 일일이 방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리 없이 서울과 부산 두 도시의 대형서점에만 사람을 풀어 스티커를 붙이기로 했다.
편집부 기자들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부산 출장은 기사를 쓴 당사자인 L기자가 자원등판해 바로 날아갔고, 다른 기자들은 이때부터 며칠간 서울을 구역별로 나눠 눈에 띄는 서점마다 들러 스티커를 붙였다. 남편 목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필자의 아내도 그 추운 겨울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동분서주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행이 뒤탈은 없었고 L기자와 필자는 시말서를 쓰는 것으로 셈을 치렀다. 이때부터 필자의 ‘청와대 출입기자’ 사칭(?)도 꼬리를 감췄음은 물론이다.
▲ 기사의 맨마지막, 끝줄에 딱 한번 집어넣은 영부인 이름 석 자 때문에 그 겨울 기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동원돼 곳곳에 산재한 서점을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정정 스티커를 붙이는 고초를 겪어야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해프닝이었지만 당시는 좀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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