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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최강의 부부기사로 평가받았던 장 주주 9단과 루이 나이웨이 9단. 그런데 두 사람이 공식대국에서 대결을 펼치게 되면? |
스포츠 경기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바둑승부에서는 형제나 자매, 부자, 부녀, 부부 등 가족기사끼리 마주앉아 혈전을 벌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주최측에서 의도적으로 조(組) 편성을 달리 하기 때문에 결승에 오르기 전까지는 같은 혈육끼리 대국을 벌이는 사태는 거의 없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갈라놓는 데도 바득바득 맨꼭대기까지 치고올라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인다면, 그것이야 말릴 재간 없는 일 아닌가.
루이(芮乃偉)-장 주주(江鑄久) 부부의 ‘반상 부부싸움(?)’도 이런 상황이다. 이기고 올라가는 데에야 어쩔 도리 없다.
2003년 맥심배 결승3번기가 세계바둑사상 초유의 부부대결로 펼치게 되었을 때 루이-장 주주 내외에게 소감을 물었다. 둘 다 멋적게 픽 웃더니 우리말이 훨씬 능숙한 아내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수줍은 목소리로 답한다.
“우승은 양보 없어요. 그러나 상금은 나눠가질래요.”
웃을 때, 석류 알갱이가 비져나오듯, 입술에 가리었던 잇몸이 오롯이 드러나 더 순진해 보이는 아줌마다. 자신은 불쑥불쑥 드러나는 잇몸을 콤플렉스로 여길지 모르나 자기 속엣것을 죄다 드러내 보여주며 웃는 웃음. 이러한 웃음은 소리 없기에 그 태(態)가 양껏 눈부시다.
남편이 셀까, 아내가 셀까.
한 지붕 아래서 한 이부자리에서 자고 일어나 한솥밥을 먹고 승패를 가려야 하는 승부사의 운명. 이야말로 영화의 가상상황이 아닌 실제상황-‘적과의 동침’이 아닌가.
결혼 전 중국에서 활동할 때와 미국에서 바둑 망명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이 벌인 대국 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남편 장 주주(江鑄久) 9단의 기억에 따르면 중국에서 아마추어시절 10번 정도 대국을 가졌는데 7:3 정도로 자신의 승률이 좋았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로 연습바둑은 한 판도 두지 않았단다. 서로의 스타일을 손금보듯 너무나 잘 알기에 재미가 없기 때문이란다. 다만 미국에서는 종종 두었다고 한다. 바둑을 둘 상대가 너무 없었던 것이다.
▲ 세계최강의 부부기사로 불린 장주주-루이 9단이 펼친 4기 맥심커피배 입신연승최강전 결승3번기는 '세계최초로 부부기사가 벌인 결승전' 기록이다. 결승1국은 정확히 2002년 12월28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이 해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모든 이들이 연말의 여흥을 즐길 시간에 이들 부부는 한치도 양보없는 '반상 부부싸움'을 펼쳐야했다. 결과는 시종 치열한 난타전 끝에 남편이 214수만에 백불계승을 거두었다.
이 부부의 우승다툼이 이번 맥심배가 처음은 아니다. 한국에 정착하기 전 미국에서 ‘북미 마스터즈 토너먼트’ 결승에서만 두번 마주친 바 있다고. 말하자면 프로의 자격으로 벌인 공식대국은 바둑 망명지인 미국에서 가졌던 셈인데 두번 모두 남편이 이겼다.
그렇지만 아무리 프로의 신분으로 치른 대회이긴 해도 미국의 프로기전은 한중일의 기전에 비하면 세미프로급 수준. 아무래도 메이저급 공식기록으로 인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맥심배 결승 앞에 ‘세계 최초의 부부기사간 결승’이란 타이틀을 붙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여간 7:3 정도로 승률이 좋았다는 남편의 장담이 허풍이 아니었던지 이 희대의 반상 부부싸움은 남편 장 주주의 2:0 승리로 또 끝났다. 공개적으로 아내를 혼내주는 걸 보면 적어도 공처가는 아닌 듯싶다. 아니면 한국에 온 뒤 아직 이렇다할 성적을 못내고 있는 남편의 기를 살려주고자 아내가 적당히 져주었거나…. ^^;;
“남편이 우승해 더 기쁘다. 남편이라 그런지 다른 기사와의 대국에 비해 부담감은 적었다."
“승부엔 양보가 없었지만 생활비는 공동관리하므로 우승상금은 사이좋게 나눠서 쓸 예정이다.”
루이 9단의 국후소감이 더 수상쩍지 않은가.
하긴 가족기사간 대결은 솔직히 말해 재미없다. 자고로 승부란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야 볼만한 것인데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으니 김빠진 사이다 짝 나지 않길 바라는 관전객들이 오히려 요상한 사람들 아니겠는가.
2000년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 결승에서 형제대결을 벌인 이상훈-이세돌 3단의 싸움에서도 우리는 김빠진 사이다를 마신 적이 있다. 아무리 ‘이기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임을 내세우는 비정한 승부세계라고는 하나 아직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가 미덕인 우리네 사고방식을 완전 지배하진 못한다.
이기면 미안하고 져도 그만인 승부라면 길게 끌 이유가 없다. 뚝딱뚝딱, 승부는 매번 점심무렵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가족간의 대국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얘기가 결코, 절대 아니다. 쌍방 승부욕이 떨어지다 보니 그만큼 박진감이 덜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이상훈-이세돌 형제대결에서 형이 이겨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입증했듯 장 주주-루이 부부대결 역시 막판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기대했지만 싱겁게 가장인 남편의 영봉승으로 끝났다. 자고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했거늘…. ^^
▲ '형만한 아우 없다?' 역시 세계최초로 형제간 결승전을 벌인 형 이상훈과 동생 이세돌. 2000년 4기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 결승3번기에서다.
‘마녀’라고 말하지 마세요?
‘반상의 마녀(魔女)’ ‘철녀(鐵女)’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소리를 듣는 아줌마. 그는 이 가운데 ‘마녀’란 별명을 무척 듣기 싫어한다.
그러나 별명이란 자신이 싫고 좋고에 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팬들이 받은 인상에 따라 지어지는 것이니 어쩌랴. 조훈현 9단이 ‘바둑황제’란 별명을 갖기 전에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던 ‘제비’로 불렸던 것처럼 팬들은 이 아줌마를 요술 빗자루를 타고 반상을 휘젓는 바둑마녀로 연상하는 것을….
사실 루이 9단의 바둑을 들여다보면 마녀, 철녀 소리가 나올 법하다. ‘모 아니면 도’ 식의 싸움바둑. 앞뒤 잴 것 없이 칼을 뽑고는 일직선으로 찔러가는 공격법. 오죽했으면 목진석 9단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까.
“루이 아줌마는 누구에게도 이길 수 있지만, 한편 누구에게도 질 수 있는 스타일이다.”
실제로도 루이 9단은 한국에 첫발을 딛던 99년 직후 ‘부동의 투톱’ 이창호-조훈현 사제를 연파하며 단숨에 국수(國手)에 올라 기염을 토했다. 세계바둑사상 여류기사로서는 처음으로 남녀 모두에게 오픈된 타이틀전(혼성기전)에서 우승하는 괴력을 보인 것이다.
난다긴다하는 남자기사들을 다 때려눕히고 여자가 우승한 사실에 얼마나 당혹했으면 원로 조남철 9단이 후배 남자기사들에게 “가위를 선물해야겠다”는 농담을 다 건넸을까. 당시 영부인 이희호 여사가 루이 9단의 우승소식을 듣고 직접 축전을 보냈을 만큼 바둑사를 넘어 여성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족적이었다. 그러나 이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는 그 뒤 이창호도 조훈현도 아닌 별로 이름 없는 저단 기사들에게 곧잘 발목을 잡히더니 슬럼프에 빠져들고 말았다.
▲ 2000년 43기 국수전에서 세계최초로 여자 도전자가 등장했다. 조훈현 국수에게 도전할 기사를 가리는 도전자결정전에서 '천하의' 이창호 9단을 꺾고 도전권을 움켜쥔 사람은 놀랍게도 여자기사, 루이 나이웨이 9단이었다. 국후 복기하는 사진에는 그림자처럼 늘 곁을 지키는 남편 장 주주9단이 보인다.
▲ 루이 9단이 세계최강의 여자기사였고, 종종 최정상급 남자기사들을 혼쭐내곤 했어도 도전자결정전에서 이창호에게까지 이기고 도전자로 나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뭐, 백번 양보해 단판승부(도전자결정전)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3판 2승제로 대결하는 도전3번기에서조차 조훈현 9단을 2-1로 뉘고 타이틀을 따낼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바둑 역사상 혼성기전에서 첫 우승한 여자기사였다. 오죽 놀라웠으면 한국바둑의 대부로 불리는 조남철 선생이 '가위 선물' 운운했을까.
기풍이 주는 반상(盤上)의 이미지는 강인한 ‘마녀’ ‘철녀’일지 모르나 바둑을 떠나 반외(盤外)에서 받는 루이 9단의 이미지는 ‘백자(白磁)처럼 순백하고 겸손한 순딩이 아줌마’다.
이 순딩이 같은 아줌마와 돌쇠 같은 아저씨의 사랑얘기는 정말로, 진짜로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순애보’이다. 이름하여 반상의 로미오와 줄리엣,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다음회에….
▲ 저 '철녀' '마녀' 아니에요~.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 산소 같은 여자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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