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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전만한 공부는 없다. 핑퐁게임하듯 300합을 주고받으며 더욱 강해진 조훈현-이창호 사제. (일러스트/김원락, 주간 세계바둑) |
한국바둑 일인자의 자리를 놓고 세계바둑사에 유례가 없는 치열한 사제대결을 펼친 조훈현-이창호 두 사람은 1988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무려 15년 간 69번의 타이틀매치를 벌였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승부의 저울추는 1992년을 고비로 제자 쪽으로 현격히 기울어 조훈현 9단이 20승 49패로 뒤지고 있으나, 승부와 관계없이 한시대를 수놓은 사제의 대결은 실로 바둑사에 영원히 남을 승부다.
이 기간 매년 평균 20국씩 총 300합을 겨룬 것도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2017년 3월까지의 통산 공식전적은 이창호 기준, 311전 192승 119패(승률 61.7%).
15년간 69회의 타이틀매치는 연 4.6회나 우승을 다퉜다는 얘기다. 한해 같은 상대와 타이틀을 다투는 회수가 이만한 것도 장난이 아닌데, 사제가 치른 도전기가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집중됐다는 걸 헤아리면 더 놀랍다. 2000년까지만 59회. 대략 10여년으로 잡고 나누면 1년에 평균 6차례나 사생결단(?)을 내는 타이틀매치를 벌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두 해도 아니고 강산도 변한다는 기간을 매일 대좌한 거나 다름없다.
300합이 넘는 실전을 통해 서로 배우며 강해진 사제
실전만한 공부는 없다. 헤겔의 정반합의 법칙처럼 서로 실전을 통해 강해지고 진화한 것이다. 사제대결 황금기 10년 세월을 자나깨나 상대 수법을 의식하며 연구했다. 특히 제자가 타이틀전에서 거둔 반집승부만도 17승 5패다. 통산대국을 통틀어서는 스승에게 총 20번의 반집승을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17번이 타이틀전에서 거둔 반집승이었다. 조훈현 9단으로서는 어찌 하늘을 원망치 않았겠으며, 이창호 9단을 일컬어 하늘이 내린 ‘신산(神算)’이라 칭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귀신 같은 계산솜씨, 종반실력을 보인 제자를 상대하다 보니 스승도 끝내기 실력이 강해졌다. 제자는 바람보다 부드럽고 창보다 날카롭다는 스승의 초중반 행마에서 바둑의 창의성, 자유로운 발상을 배웠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흔히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하지만 위대한 스승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뛰어난 제자가 있었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한편 자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조훈현-이창호 사제 관계에도 적용된다.
사제의 바둑에 대한 정열과 경쟁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재미난 사례가 있다. 아래 글은 97년 주간세계바둑 창간예비호에 <사제는 증말 무서버!>란 제목으로 발표했던 칼럼이다.
▲ 콧김을 쐴 정도로 이렇게 가깝게 얼굴을 맞대고 10년이 넘도록 '진검승부'를 벌였다. 차민수 프로의 말마따나 '참말 징글징글한 사제, 불세출의 승부사'다.
참말 무서운 사제
97년 4월10일 오전11시 서울발 도쿄행 KL703기편 비즈니스 클래스석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톱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훈현, 이창호, 유창혁, 서봉수, 양재호, 최명훈에 차민수까지. 이틀 후 일본기원에서 벌어지는 10회 후지쯔배 등정에 나선 참이다.
비행기가 대한해협을 건널 때쯤 나란히 앉았던 조훈현 9단과 미국대표 차민수 4단이 무료함을 못참겠다는 듯 며칠전 두었던 8회 동양증권배 결승2국(조훈현:고바야시 사토루)의 승부처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물론 바둑판은 없다. 명승고찰에서 수도하는 선승들의 선문답처럼 말로 주고받을 뿐이다.
▼ [장면도] 제8기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 2국
백 조훈현 9단
흑 고바야시 사토루 9단
<1997.4.2, 236수 끝, 백 불계승>
<장면도>는 이날 화제에 오른 문제의 대목. 백을 든 조9단이 1로 바짝 다가서자 고바야시 9단 역시 흑2로 다가섰는데, 여기서 백이 3으로 하나 헤딩한 다음 수법에 있는 대로 8의 곳에 뛰지 않고 5의 자리로 뛰어나가면서 분란이 일었다. 이렇게 되면 흑6,8의 절단은 기세. 바로 이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여기서 조9단은 백9로 뻗어 이하 흑16까지 처리하고 말았는데, 우하변은 그것대로 굳혀주고 좌변은 좌변대로 흑A로 뛰어드는 맛을 남겼으니 백의 포석실패가 자명하다.
(조훈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묘수가 있었어. <1도> 백1로 끊었으면 흑이 끝장이었어. 다음 흑4,6으로 두는 것은 백9로 몰고나와 그만이더라구.”
▼ <1도> 조훈현의 묘수.
마침 바로 뒷좌석에서 이창호 9단이 스승의 이 말을 듣고 있었다. 도쿄 시내의 에드몬드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제자는 스승이 말한 묘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이 지났다. 이9단은 함께 대회에 참가한 동갑내기 최명훈 5단의 소매를 슬며시 붙잡고 말했다.
“어제 비행기 안에서 선생님이 말한 수 있지? 그거 <2도> 흑1에 붙이는 묘수가 있어 안돼.”
▼ <2도> 이창호가 하룻밤새 찾은 묘수.
백2에 서면 흑3으로 부딪쳐가는 수가 기가 막혀 다음 A로 넘는 수와 B로 나가 백 다섯 점을 잡는 수가 맞보기라 백이 안된다.
이 수를 최명훈 5단이 식당에서 만난 차민수 4단에게 전했고 다시 조9단에게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후지쯔배 본선 1회전이 있는 날. 일본기원 대국장으로 가는 차안에서 조9단은 작은 소리로 차4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창호가 어제 얘기한 그 수 말야. <3도> 백1로 역으로 부딪치면 어쩌겠다는 거지?”
▼ <3도> 조훈현이 하룻밤새 다시 찾은 묘수.
차4단은 순간 무릎을 쳤다. “햐~, 그런 수가 또 있었나?”
흑은 2로 젖혀봐야 이하 백9까지 꼼짝없이 장문에 걸려든다.
차4단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 친구들 정말 대단하군. 달리 바둑황제들이 아니야. 증말 무서버~.
하룻밤 사이를 두고 주고받은 사제간의 묘수 공방.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듯 세계정상은 호텔방에서도 결코 쉬지 않는다? <주간 세계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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