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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만으로는 힘들다'며 새끼호랑이(이창호)를 스스럼없이 내제자로 들여 백호로 키운 조훈현 9단. 조훈현-이창호 사제는 한국바둑의 원투펀치로 맹활약하며 우리 바둑을 1990년대 세계최강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앞에서 스승이 끌고 뒤에서 제자가 미는 한국바둑은 무적함대였다. 사진은 1999년 제1회 춘란배에서 1~3위를 싹쓸이한 한국기사들의 모습. 스승(조훈현)이 우승했고 제자가 준우승했다. 3위는 최명훈. 세계대회에서 스승과 제자가 결승에서 만나 나란히 우승, 준우승을 석권한 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
전주 창호네 집을 다녀온 그이는 무슨 대접을 어떻게 받았는지(?) 이미 마음을 굳히고 상경한 듯했다. 다만 솟구치는 제자 욕심을 출산을 한달여 앞둔 만삭의 아내에게 대놓고 말 못할 뿐이었다.
“앞으로 나 혼자로는 힘들어. 머지않아 바둑계도 세계화가 될 텐데 지금부터 든든한 후진을 키워 놓지 않으면 일본, 중국 애들에게 먹히고 말아. 국제대회에 대비하려면 창호 같은 애들을 받아 한시바삐 다듬어야 해. 한국바둑이 언제까지 2류국가로 멸시 받아서야 되겠어?”
그이가 내게 말한, 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당위론이었다. 84년 그때만 해도 우리바둑은 일본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대회란 건 생각도 못할 때였고,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을 앞세운 일본은 중국 유혹에만 정신이 팔려 한반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작 TV속기 교류전 정도나 1년에 한번 있을 둥 말 둥, 한국과의 교류전은 손해만 본다는 속내로 발길조차 끊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쩌다 일본의 정상급 기사가 한번 방한이라도 할라치면 마치 IMF의 캉드쉬 총재를 맞듯 호들갑을 떨어대던 씁쓸한 시절이었다. 바둑선진국인 일본이야 우리바둑을 그렇게 한수 아래로 비하한다고 쳐도 우리 스스로 몸을 낮출 건 또 뭔가. 80년말 조치훈 9단이 명인을 따고 귀국해 그이와 두판 기념대국을 벌였을 때 그이는 한국의 모든 타이틀을 갖고 있는 1인자였건만 대국료에서부터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게 한 사례다.
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남편의 변
“혼자로는 힘들어...”
입밖에 드러내 놓고 말은 않았지만, 한국바둑의 1인자로서 우리바둑이 제 대접을 못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이는 무척 자존심 상해하는 눈치였다. 더불어 우리바둑을 한 계단 끌어올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절감하고 있었다. 창호를 데리고 와 물건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에는 그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남편의 판단은 몇 수 앞을 내다본 정확한 수읽기였다. 4년 뒤인 88년부터 국제대회가 러시를 이뤘으니 말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내제자를 들이는 일은 작게 보면 한 가정의 일대 변화를 뜻하는 일이었다. 거창하게 한국바둑의 미래를 생각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기 이전에 난 한 집안의 살림과 아이들 양육을 책임진 주부였다. 생각해 보라. 그때 조훈현 9단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장남 민제가 고작 네 살. 내 자식 하나도 변변히 키워 보지 못했는데 어찌 남의 자식을 데려올 엄두를 낼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그이가 내제자 운을 꺼낸 84년 7월초는 둘째 윤선의 출산을 겨우 한달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여자. 그토록 너무 너무 데려오고 싶어 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앞에서는 “노”를 외쳤지만은 뒤로는 이사갈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막상 창호를 데려온다 해도 화곡동은 종로의 한국기원과 거리가 멀어 어린아이 혼자 나다니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종로와 몇 정거장 떨어지지 않은 연희동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맏딸 윤선이를 낳은 날이 8월13일. 부기도 빠지지 않은 몸으로 연희동으로 서둘러 이사한 날은 8월16일인가 17일인가였다.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마친 창호가 여름방학을 마치자마자 이대부속초등학교로 전학, 2학기부터 차질없이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서둘렀던 것이다.
▲ 서울 연희동에 살던 시절 [월간바둑]에서 연재하던 '기사의 집'에 출연했을 당시 조훈현 9단의 가족사진. 1987년 정초라 한복을 입고 찍었다. 연희1동 446번지에 자리한 2층 양옥집은 내제자 창호를 위해 서둘러 이사한 집이었다. 이 사진을 찍을 때는 창호를 내제자로 받은 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때 정미화 씨의 나이 30세(조9단 32세). 장남 민제가 7세, 맏딸 윤선이 4세, 막내 승희가 2세에 불과했다. 게다가 시부모까지 모시는 처지에 27세 때 세째아이를 막 출산한 시점에 남의 집 자식까지 돌보야한다는 게 어디 쉬운 결정이었을까.
내제자를 위한 맹모삼천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모든 일을 해치웠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자의 일생은 평생 세명의 남자, 즉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는 하지만, 남편의 길을 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또 그런 상황에 닥친다면 이번만큼은 결단코 “노”를 외칠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는 내제자 양성에 대해 초보운전이라 뭘 몰라도 한참 몰랐기에 “예스”한 부분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후 광주의 바둑신동 김지석이에게는 기회를 뺏은 것 같아 미안한 심정이다. 오규철 사범을 사사하던 지석이를 그이는 이창호 다음 내제자로 받아들일 뜻이 있었으나 이때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부터 초등학교까지 세명의 아이를 두고 있는 부모의 입장이라면 교육적으로 이 시기가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시기인지 이해될 것이다.)
그이가 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글쎄, 이건 그 어떤 의무감이라거나 욕심 이전에 승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수 없이 당기는 호기심 같은 것? 매력 같은 것이랄까. 그이는 창호와 두 번에 걸친 시험기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전혀 반대되는 성향의 싹을 발견했고 그런 바둑을 두는 어린애에게서 그 어떤 가능성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약간의 호기심과 더불어 나와는 다른 이 놈의 바둑은 커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이 “(창호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란 그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84년 8월말 창호는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연희동 새집으로 들어왔다. 몇달전 화곡동 집에 처음 왔을 때 창호를 한번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는 내제자로 들어오리라는 걸 상상도 하지 않았을 때였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제자로 들어오던 그날 비로소 창호를 정면으로, 자세히 대면한 것이다. 창호의 할아버지(이화춘․86년 작고)와 아버지 이재룡 씨도 그때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월간 바둑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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