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하이라이트는 대진 추첨이다. 과연 누가 누구와 붙는가. 모든 관심은 최강자의 추첨에 쏠리기 마련이다. 20세기 마지막 절대강자였던 이창호 9단은 모든 기사의 경계대상, 기피대상 1호였다. ‘이창호 카드’를 뽑은 기사는 아연 얼굴이 굳어지며 웃음을 잃었다. 사진은 제7회 후지쯔배 대진추첨 광경.
내로라하는 세계고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장 두려워하는 기사는 이창호 9단이다. 대진 추첨식에서 ‘이창호 카드’를 뽑은 기사는 그 순간 얼굴이 굳어지며 웃음을 잃는다. 자타가 공인하는 현 세계바둑 랭킹1위가 이창호임을 입증하는 사례다.
오죽했으면 ‘바둑외계인의 환생’이라고까지 말하는 그의 바둑은 어디가 어떻게 강한가? 남모를 비결이 있을까.
1. 성격적으로, 선천적인 승부사의 기질을 타고났다.
보통 ‘승부사’ 하면 얼음장같이 차고 날카로운 검객의 눈초리를 떠올리게 된다. 조훈현이 그렇고 이세돌의 눈매가 그렇다. 산정에 앉아 먹잇감을 살피는 매의 눈을 연상케한다. 그런데 이창호가 풍기는 이미지는 이와는 거리가 있다. 순박하고, 때로 미련스럽게 보이는 황소의 눈망울에 더 가깝다할까.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 바둑이 냉정하고 예리하다. 승부에서 흔들리지 않고 순식간에 맞는 승부처를 휘어잡으려면 형세를 보는 대국관이 넓고 깊어야 하며 찬스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뛰어나야 한다. 마치 물목에서 미동도 않은 채 먹이감이 걸려들 때까지 하루고 이틀이고 기다리는 악어처럼 이창호의 바둑은 ‘천년이라도 끄떡없이 기다릴 강태공’을 연상케 한다. ‘반상의 강태공’ ‘애늙은이 바둑’ ‘돌부처’ 등의 별명이 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승부세계에서 흥분은 금물이다. 아무리 훌륭한 기사라도 희노애락의 감정에 휩싸이는 인간인 이상 국면의 변화에 따라 흥분하게 된다. 이창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창호는 감정을 억제하는 ‘마인드컨트롤’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포커 페이스’라는 점. 무색 무미 무취, 얼굴표정이 없다. 이렇다 보니 상대기사는 흡사 거대한 산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오히려 심리적으로 제풀에 쓰러지고 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2. 바둑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끝내기 실력’을 갖췄다.
바둑에서 끝내기 부문은 포석과는 달리 단기간의 공부로 경지에 올라설 수 있는 분야가 아니란 게 바둑계의 상식이다. 끊임없는 경험과 연륜을 쌓으면서 터득하는 게 ‘끝내기’인 걸로 인식해 왔는데, 이창호는 어린 나이 때부터 포석과 중반 부문에 앞서 마무리(끝내기)에서 먼저 도통한 기현상을 보였다. 이것은 바둑계에서조차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수치로 명확히 산정하기 힘들다는 두터움을 재량하는 눈, 이를 바탕으로 자로 잰 듯 반집까지 계산해내는 형세판단은 이전 기사들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경지였다. 바둑계에서 오청원 9단의 신포석 혁명이 패러다임을 바꾼 일대 전환점이라고 평하고 있지만, 끝내기에 관해서만큼은 이창호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다.
계산에 강하다는 것은 곧 형세를 보는 눈과 수리력이 강하다는 얘기다. 현대바둑은 종반이 강한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초중반은 이미 수백년 동안 연구되어 백일하에 드러난 데 비해 끝내기 부문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창호는 타고난 ‘계산 능력’을 앞세워 선두를 달리고 있는 셈이다.
3. 노력하는 천재에겐 못 당한다. 으뜸비결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자세.
‘천재는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점이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는 그의 연구열이다.
바둑의 신이 아닌 이상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이창호를 지탱하게 하는 최고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최정상에 오르고서도 매일 새벽 한두 시까지 기보를 놓아보며 공부하는 자세. 외부와 연결된 신경세포는 모두 죽인 채 오로지 한길 우물만 파는 이창호의 이러한 열정은 주위의 경쟁자들을 질리게 할 정도다. 외국에 나가서도 호텔방에만 틀어박혀 바둑판과만 씨름하는 그다.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9단이 그의 내제자들에게 “이창호를 본받으라”고 단단히 나무라면서 이렇게 정신무장시켰다고 한다. 이창호가 오늘날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부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실력만으로도 세계최고인데 이토록 파고드니 과연 누가 따라잡을 엄두를 낼까. 이창호 9단의 목표는 이제 인간세상에서 정상에 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가설 수 있는 ‘바둑의 한계선’에 대한 도전이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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