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을 비롯해 앞으로 사용하는 자료사진은 한국기원 [월간바둑]과 인터넷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에서 가져온 것임을 앞서 밝힙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30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장고도 10년을 치면 제 소리를 낸다는데 하물며 30년이나 바둑밥을 먹고서도 제 청 한가닥 뽑아내지 못한 채 여즉 변성기에 머물고 있는 음치입니다. 이 모양이니 명색이 30년 동안이나 바둑글을 끄적거렸다는 놈이 단행본 한권 내지 못한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정도는 읊는다 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적지 않은 터수이고 보면 쓴 글도 그럭저럭 되고 그 가운데 리바이벌하거나 리메이크해 다시 선보여도 크게 면박받지 않겠다 싶은 것도 더러 있는 듯싶어 이참에 하나씩 다듬어 올려볼까 합니다.
여기에 연재하는 [바둑스토리]는 제가 1988년 월간바둑에 바둑기자로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보고, 듣고, 읽은 바둑계의 이야기입니다. 주로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던 <정용진의 바둑수첩>과 월간바둑 기자로서 썼던 글, 여기에 틈틈이 각종 매체에 청탁을 받아 기고했던 원고들입니다. 여기에 인터넷바둑사이트에 근무하며 쓴 칼럼들을 더했습니다. 다만 연식이 좀 된 것들은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조금 손을 보거나 아니면 전면 재구성했습니다.
길게는 20년이 더 지난 글까지 뒤져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나름 의미 있겠다 싶어 수록하는 것이지만) 이런 단면 단면이 모여 바둑동네의 풍경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말하자면 모자이크화 같은 거랄까요. 조각 조각을 음미하다 보면 바둑사의 큰 흐름이 그려지고, 당시 현장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여기저기 시차를 두고 기고했던 글들이다 보니 더러 중복되는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바둑계의 한때를 되새김질한다 여겨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바둑스토리]의 연재 서두는 일부러 ‘바둑상식’ 내용으로 포진했습니다. 이는 ‘알파탭’으로 바둑을 배우는 주 대상이 성인보다는 어린이, 여성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아는 이에겐 아주 기초적인 상식일지라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과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번 더 확인하는 기회가 되면 다행이겠고요, 뻔한 바둑상식이나마 여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면 함께 버무려 재미를 고명처럼 살짝 얹어봤습니다.
약방의 감초, 음식의 고명처럼
바둑은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입니다. 배우기가 쉽지 않고(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실력이 빨리 늘지 않으며 그 묘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기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음악 분야를 예로 들면 클래식과 비슷합니다.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에 비해 클래식은 골치 아프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 공부가 필요한, 아는 만큼 더 볼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유구한 전통이나 시간을 요한다는 점도 바둑과 흡사합니다. 교향곡 한 곡을 온전히 감상하려면 최소한 30분은 잡아야 합니다. 처음엔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며 장시간 앉아 듣다 보면 온몸을 배배꼬게 만드는 음악이지만 그 진미를 느끼는 순간부터 푹 빠지게 되는 것이 클래식입니다.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의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바둑이나 클래식이나 한번 빠지면 오래갑니다. 생명력이 길다는 것이지요.
진입장벽이 높다고는 하나 이는 일반론일 뿐 클래식은 입문단계에서 곧장 그 매력에 홀딱 빠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곡에 대한 정보는 물론 악보를 읽을 줄 모르거나 악기 하나 다룰 줄 몰라도 음악을 감상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들어서 감흥을 느끼면 그게 최고의 감상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둑은 클래식보다 더 불행합니다. 바둑은 둘 줄 모르면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 초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을 벌였을 때 전국민이 생중계를 지켜보며 열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5:0으로 가볍게 이길 것이라던 이세돌 9단이 거꾸로 일방적으로 진 결과 때문이 아니라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남녀노소가 ‘신의 경지에 들었다(入神)’는 9단의 한수 한수에 일비일희하며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축구와 야구는 규칙을 몰라도, 직접 운동장에서 뛰어본 경험이 없어도 관전하며 신나게 응원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바둑은 국면마다 놓이는 착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수준이 되지 못하면 “까맣고 하얀 것은 바둑알이요 금이 그어진 것은 바둑판일 뿐”인 게임입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설사 바둑내용에는 까막눈이더라도 이를 중계하고 설명하는 해설자들이 얼마나 맛깔스럽게, 알기 쉽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긴장감과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요. 클래식 본류에서 파생된 크로스오버니 세미클래식이니 하는 장르가 좀더 대중에게 쉽고 부드럽게 다가서기 위한 방편으로 탄생한 것처럼, 여기에 소개하는 이 [바둑스토리]가 바둑을 좀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클래식 음악 취미에 빠져들 때 작곡가의 일생이나 곡에 얽힌 에피소드를 다룬 이야기책이 흥미를 더욱 유발했듯 말입니다. 읽다 보면 바둑의 역사와 상식, 승부사의 영욕과 애환, 바둑사를 수놓은 명승부와 이면을 엿보게 될 것입니다.
바둑의 무궁무진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용진 인터넷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Cyberoro.com)에서 바둑콘텐츠 총괄이사로 재직 중이다. 1988년 한국기원 [월간바둑] 기자로 입사한 뒤 10년간 편집장을 하다가 2002년부터 인터넷바둑 콘텐츠 분야의 일을 하고 있다. 바둑 월간지 2종과 주간지 1종을 창간했고 바둑웹진의 틀을 잡았다. 2000년 한국잡지언론상 기자상을 수상했고, 바둑평론가로 여러 매체에 바둑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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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전통이나 시간을 요한다는 점도 바둑과 흡사합니다. 교향곡 한 곡을 온전히 감상하려면 최소한 30분은 잡아야 합니다. 처음엔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며 장시간 앉아 듣다 보면 온몸을 배배꼬게 만드는 음악이지만 그 진미를 느끼는 순간부터 푹 빠지게 되는 것이 클래식입니다.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의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바둑이나 클래식이나 한번 빠지면 오래갑니다. 생명력이 길다는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