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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의 또 다른 적(敵)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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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의 또 다른 적(敵)은 시간
| 한창규 2004-11-30 오후 06:48 [프린트｜스크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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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의 싸움. 조치훈이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적에 무너졌다.
지상 최고의 속기파와 장고파의 만남. 가장 빠른 손놀림을 과시하는 뤄시허와 언제나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조치훈. 이 판에서도 그런 대조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장고를 즐기는듯 일찌감치 정석 과정에서 초읽기에 몰리기 시작한 조치훈에 비해 뤄시허는 속전속결로 해치우며 단 7분만 사용. 그 나머지 소유시간의 차이가 운명을 갈라놓은 요인이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6회 농심신라면배 제9국
○뤄시허 9단(중국) ●조치훈 9단(일본)
- 장소 : 부산 농심호텔
- 날짜 : 2004. 11. 28
- 결과 : 134수끝, 백불계승
장면 (맞불작전)
시간 안배에 실패했다고 할까. 긴바둑은 물론이고 속기도 정평이 나 있는 조치훈이지만 이 바둑에서만큼 1분초읽기 하나는 턱없이 부족했다. 워낙 난해하게 얽힌 대마싸움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변에서 발단됐다.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국면에서 흑1로 붙인 쪽이 조치훈. 밀리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뤄시허도 2, 4로 강력하게 맞불을 놓았다.
참고도1 (흑의 주문)
흑1의 붙임은 백2로 받아달라는 주문. 그러면 흑5로 몰아치겠다는 의도다.
뜻이 관철되면 일방적으로 백을 좇아내는 즐거움을 가진다. 우하의 두터움도 공격에 가담한다. 도처에 장만해 놓은 도톰한 실리가 돋보여 흑의 낙승 무드.
참고도2 (평온한 정돈)
백의 반격이 거슬린다면 흑1로 찝은 다음 3, 5로 달아나면 평온하다. 더욱이 진작부터 초읽기에 몰린 터라 가급적 복잡한 상황을 회피하는 의미에서도.
하지만 투혼의 승부사 조치훈은 최철한과의 대국에서도 그랬듯 한중 젊은 강자들을 상대로 어디 한번 맞부딪쳐 보자는 의식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황혼으로 접어드는 바둑인생의 열정을 불태워 보려는 듯이.
실전진행1 (악수붙임)
심사숙고한 수를 상대방이 별로 생각지도 않고 똑딱똑딱 받아치면 허탈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승부호흡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승부사 조치훈이 그런 분위기에 흔들릴 리는 만무할 터.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또 하나의 적, 초읽기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최선의 착점을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맥처럼 보이는 흑1이 악수. 반면 몰고 밀어간 백6, 8이 호수. 흑A의 끊음을 방비하고 있다(백B, 흑C, 백D로 장문). 그러고 나서 백10으로 출구를 완전봉쇄했다. 흑에게 기회도 사라졌다.
참고도3 (삶은 패배)
대마가 갇혔다. 안에서 사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순간 승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다.
잠자코 흑1로 따내면 간단히 삶. 백2, 4는 선수일지라도 계속해서 8로 잡으러 들다가는 도리어 걸려든다. 흑13까지 촉촉수.
참고도4 (수상전)참고도4
실전은 회복불능에 빠져든 코스. 시간이 없는 것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때가 있으랴. 경황이 없다. 이쯤되면 거의 혼돈 상태나 다름없다.
국후 검토에서 수상전을 시도하는 변화가 집중적으로 검토됐다. 그 중 유력한 안이 흑1로 뻗어서 싸우는 수. 백2를 빼앗기더라도 흑3으로 수수를 늘이고 5, 7로 막는다. 외길은 아닐지라도 긴 수순을 밟아가면 흑이 딱 1수 빠르다. 도중 백8로 A로 나가려 해도 흑11, 백17, 흑B로 끊겨서 안 된다.
실전진행2 (승산 없는 싸움)
어차피 살리는 정도로는 가망이 없다. 발꿈치에서 두집 내고 사는 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흑1은 뼈를 묻겠다는 심정. 에워싸고 있는 백과 한바탕 싸워 보려는 수인데 백2를 허용해 무조건 사는 수단도 소멸됐다.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조치훈. 최후 흑5 이하로 도발해 봤으나 이미 승산 없는 싸움판으로 변해 있었다.
복잡해질수록 시간이 많은 쪽이 유리한 것은 불문가지. 1분 안에 모든 변화의 실타래를 풀기란 역부족이었다. 뤄시허는 천재형 속기파라는 명성에 걸맞게 제한시간을 20분이나 남겨둔 채 대마를 수중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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