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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장 주주 부부는 2003년 4회 맥심배 결승에서 세계 최초로 부부 결승대결을 펼쳐 대단화제를 모았고, 다들 잔뜩 ‘대단한 부부싸움’을 기대했으나 승부는 다소 싱겁게(?) 2-0, 남편의 승리로 끝났다. 루이 9단은 “남편이 더 잘 둔다. 그러나 상금은 공동 통장으로 들어갔다”며 웃었다. (사진은 4회 맥심배 시상식 장면) |
장 주주 9단이 중국을 떠나게 된 경위에 대해 여러가지 억측이 있는 만큼 이부터 언급하는 게 좋겠다. 항간에는 그가 1989년 중국의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는 천안문(天安門) 사태 때 선두에 서 피켓을 들고 적극 참여한 주동자로서, 이후 정부 당국의 추격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주동자는 아니었지만 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것은 맞다.
1985~86년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장 주주는 일본의 내노라하는 일류들을 5연속 날리고 ‘항일 영웅’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중국을 대표하는 기사로 떠올랐다. 당시 중국바둑계의 간판스타는 ‘대륙의 영웅’ 녜 웨이핑(聶衛平) 9단이었고 장 주주는 그 뒤를 이을 기대주로 자리했다. 그 정도 위상이 있는, 따라서 일거수 일투족이 바둑팬들에게 영향을 미칠 국가대표 기사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중국바둑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런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정치적 소신이 확고했던 장 주주는 결코 ‘추위를 타지 않고’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소문대로 주동자는 아니었다.
당시 중국 국가대표팀의 지도부는 녜 웨이핑, 뤄 지엔원(羅建文), 화 이강(華以剛) 3인방이 이끌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바둑의 영웅, 녜 웨이핑 9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실력적으로도 일인자일 뿐 아니라 정계인맥 쪽으로도 덩 샤오핑(鄧小平)이 가끔 불러 브리지 게임을 함께 할 정도로 뒷배가 든든한 실력자여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덩 샤오핑이 통치하던 시절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동참한 장 주주를 중국바둑 지도부가 가만 놔둘 리 없다. 이런 정치적 압박에 짓눌려 장 주주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상 정치적 망명이라고나 할까. 다만 항간에 떠돈 밀항이 아니라 정식 비자를 받고 출국했다.
루이 9단의 일본행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역시 ‘샨사 사건’으로 중국 지도부 3인방 가운데 특히 뤄 지엔원 7단에 ‘찍혀’ 종내는 대표팀 옷을 벗게 되었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어쩌면 전생에 이미 점지된 필연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심 끝에 루이 9단은 어렵사리 일본에 갔으나 활동할 수 없는 기사가 되었다. 일본에서 기사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결정적인 요인도 바로 중국바둑 지도부가 일본기원에 보낸 공문서 때문이었다. 루이 9단은 중국기원 소속 기사이므로 일본기원이 주최, 주관하는 공식기전에 참가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골자였지만, 대놓고 얘기하면 루이는 정치적으로 중국기원과 문제가 있는 기사이니 일본기원이 알아서 조처하라는 메시지였다. 일본기원으로서도 중국기원과 외교적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중국에서 온 여자기사 한명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 여자바둑계를 단숨에 정복할만한 위력을 가진 이 중국 여기사에 대한 경계심도 발동하고 있던 터수였다. 일본 남자바둑은 린 하이펑(林海峰)이나 조치훈 같은 용병기사들에게 ‘반상 요코즈나’를 이미 빼앗긴 바 있다. 그런데 여자바둑마저 외인에게 내줄 순 없는 노릇이니 때맞춰 날아온 중국기원의 협조공문은 불감청(不敢請․선뜻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고소원(固所願․내심 바라던 바) 아니었겠나. 실제 이 뒤 일본 여자기사들을 대상으로 루이 9단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데 대한 찬반을 묻는 투여가 있었고, 만장일치로 ‘원하지 않는다’란 결과가 나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 중국에서 바둑의 길이 막힌 두 사람은 천상 중국 밖에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장 주주가 먼저 미국으로 떴다. 루이는 비자 문제가 걸려 있어 ‘유학’ 방식으로 뒤이어 일본으로 갔다. 이때부터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열애는 2년을 이어갔고, 바둑지도로 근근하게 생활하던 루이 9단은 월세만큼 국제전화요금을 내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2년 장주주가 일본에서 열린 2회 응씨배에 참가하면서 재회했고 그 길로 곧장 중국대사관에 가 혼인신고부터 했다.
▲ 1990년 2회 응씨배에 출전한 루이 9단은 한국의 떠오르는 황태자 이창호를 16강에서 돌려세웠다. '반상의 아마조네스 아줌마'에게 한방 얻어맞은 이창호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돌아오는 비행기편에 울먹였다고 한다.
세계 최조로 입신(9단)의 경지에 오른 여자기사, 일찍이 이처럼 뛰어난 실력을 보인 승부사였지만 보수적인 일본기원은 체류 6년간 끝내 정식기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기원과의 마찰을 염려했다고는 하나 “너무 실력이 세 일본 여자바둑을 석권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던 탓이다. 루이 9단은 체류 6년간 “기전에 나갈 수가 없어 바둑 지망생을 가르쳐 지도료를 받으며 생활했다”고 회고했다. 루이를 알아본 '기성’ 우칭위안(吳淸源) 9단이 루이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일본기원은 끝까지 외면했다.
그러나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꼭 루이 한 사람의 영향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필자는 이때의 거부권 행사가 일본여자바둑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빈삼각의 착점이었다고 본다.
루이 9단은 이후 6년간 일본에서 아마추어 지도로 밥벌이를 하며 혹독한 야인(野人) 생활을 하다가 1996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시 3년 뒤인 1999년 4월 한국에 정착했다. 이 순간부터 세계 여자바둑계의 판도가 뒤바뀐다. 이미 남자바둑에 관한 한 10여년째 세계바둑을 제패하며 확고한 선두 위치를 구축한 한국바둑은 ‘반상 유랑객’으로 떠돌던 루이-장 주주 부부를 객원기사로 받아들였다. 세계를 제패한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여자바둑은 중국-일본보다 한수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때였지만 한국 여자기사들의 패기만큼은 일본 여자기사들과는 천양지차였다. 루이 9단의 ‘싹쓸이’를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루이 9단을 받아들이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역부족이겠지만 그런 최정상급 여자기사와 자꾸 부딪쳐 봐야 실력이 는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일부러라도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는데 호랑이가 제발로 찾아온다 하니 오히려 좋은 기회가 아닌가.” 뭐 이런 패기였다.
그리고 4년이 다시 지나 한국여자바둑은 일본을 확실히 따돌리고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늘 가까이에 루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스스로 다잡으며 분발한 결과다. 일종의 ‘매기효과’ 같은 거였다. 군복무차 일본에서 귀국해 이후 한국바둑을 적어도 한 점 이상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조훈현 9단처럼 한국여자바둑의 급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한 기사가 루이 9단이었다.
▲ 한국 정착을 기점으로 달라진 루이의 헤어스타일. 한국에 오기 전 중국의 여자 간판스타로 활동할 때는 왼쪽처럼 치렁치렁한 긴머리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다. 1999년 한국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단아한 단발커트 스타일을 유지했지만, 삼손처럼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하여 힘을 못쓰거나 하지 않았다. 바둑판 앞에서는 변함없이 괴력을 뿜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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