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한국기원에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아무도 이 피아니스트의 존재를 몰랐다. 피아니스트는 바둑이 고팠다.
"한국기원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바둑강의가 있습니까?"
예전에 있었으나 현재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가 없다는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 피아니스트는 한국기원에서 승부를 벌이는 프로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싶은 생각이 들어 "한국기원에 가면 프로들의 시합을 직접 볼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으나 "프로 공식시합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단호한 대답을 들었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중인 피아니스트 유영욱의 이야기다.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의 쑥쓰러운 웃음이 보인다.
1월 20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옆에 자리한 유래회관에 여러사람들이 모였다. 저녁 7시에 약속을 잡은 이 자리에는 유영욱 교수(37)를 비롯해 유영욱 교수의 바둑선생님인 김효정 프로와 사이버오로 손종수 상무, K바둑 임설아 이사 등이 함께 하기로 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람들이 모였다. 마침 업무를 마친 양재호 총장까지 함께 자리하면서 저녁 자리가 뭔가 거대해진 느낌이다. 고깃집의 인터뷰는 좀 생소하지만 소고기 맛에 한껏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고기가 타면 안 된다.
유영욱은 9살에 피아노를 만졌다. 그리고 10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으로 직접 피아노 곡을 작곡해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 바 있다. 최근의 콘서트에서 그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 - 우리는 이런 경우 음악 천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출처 playdb.co.kr)
중학생때부터 미국 줄리어드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2007년 독일 본에서 열린 베토벤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해 '한국의 베토벤'으로 명성을 떨친다. '베토벤이 지금 살아있다면 유영욱처럼 피아노를 쳤을 것이다'라는 콩쿠르 심사위원들과 클래식 음악계의 극찬을 들었던 것도 이 시기다. 2008년엔 본격적인 '연주 투어'를 시작했다. 독일, 네덜란드, 캐나다, 일본, 헝가리, 루마니아, 미국, 폴란드 등 음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며 콘서트를 가졌다. 그는 명성과 부를 움켜쥘 수 있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2009년 피아니스트 유영욱은 스타 연주자로서 세계를 누비는 삶을 포기했다. 그가 정착한 곳은 연세대 음대다. 그해 유영욱은 연세대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되어 화제를 모았다.
음악인 중에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는 할 수 없다. 가수 김장훈, 평론가 강헌 등 유명인도 꽤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 클래식 음악의 연주가들중에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은 정말이지 흔치 않다. 대부분 해외로 조기 유학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유영욱은 어떻게 바둑을 배웠을까? 그것도 바둑이란 것 자체가 희귀했던 미국에서 말이다.
"아예 둘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죠. 동양인이고 조금이라도 바둑을 알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 '바둑 둘 줄 아세요?'하고 물어봤다니까요. 큰 건물의 경비 아저씨나 그런 분들에게도 그냥 다가가 그렇게 많이 물었죠. 뉴욕에는 기원도 있었는데 그런 쪽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내기바둑 아니면 바둑을 아예 안 두려고 하는 것도 참 힘들었어요, 하하"
독학이 맞다. 게다가 바둑 마니아다. 스스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체스를 배웠으나 곧 싫증이 났고 바둑을 발견하고 이를 파고들었다. 혼자서 말이다.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상용화 되면서 인터넷 바둑을 둘 수 있었고 바둑 잡지도 자주 사 봤다. 그래도 직접 프로를 만나 배우고자 하던 갈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가 한국에서 교수로 임용된 후에 해소할 수 있었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한국기원 지하 바둑TV 라운지에서 현재도 진행중인 오프라인 바둑강습이었다. 전문 바둑인들이 나서 바둑팬을 대상으로 한 강좌였다. 유 교수는 바둑TV에서 이를 보고, 강좌를 신청하게 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한 명의 바둑팬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영역이었던 평소 그리던 한국기원에 와서 김효정 2단을 만나 우정을 쌓게 된다. 매력적인 피아니스트의 등장에 대한 김효정의 평가.
"왜 그때서야 나타난 거에요, 제가 결혼하기 전에 나타나실 것이지"
다음 달 출산을 앞둔 김효정 프로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김효정 프로 부부와 유영욱 교수는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현재 유영욱 교수의 기력은 인터넷 바둑의 짱짱한 4단(오로바둑 기준)이다.
▶ 이런 모습의 피아니스트가 바둑을 배우러 왔다. (출처 playdb.co.kr)
바둑과 피아노는 닮은 점이 있다. 반상의 흑백 바둑돌이 있듯, 피아노의 건반이 흑백이다. 흑백의 수담(手談)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양재호 총장은 바둑공부를 할 때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즐겨 듣던 음악 마니아였다. 과거 바둑 공부가 잘 안될 때, 현재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모짜르트를 즐겨듣고, 직원들에게 피아노를 배워서 1년 뒤 연주를 해볼 것이라는 '작은(?) 약속'을 덥썩 하기도 했다. 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음악 애호가인 양재호 총장(프로 9단)의 스타일은 음악가 중 누구와 닮았을까?
'한국의 베토벤' 유영욱의 평가가 나온다. 그는 진정한 바둑 마니아다.
"양 총장님의 경우는 베토벤입니다. 바둑 스타일을 보면 극한의 상황에서 최선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베토벤입니다. 재능에선 모짜르트를 앞서긴 어렵겠지만 본인의 노력과 열정으로 많은 것을 이뤄냈습니다. 양 총장의 바둑을 이창호의 기보집에서도 많이 봤어요. 바둑TV에서 해설도 많이 봤는데, 최근에는 잘 안보여서 아쉬웠어요"
양재호 총장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하는 음악은 모짜르트지만 성향은 분명 그런 것 같습니다. 바둑을 그렇게 뒀죠. 최악의 상황으로 최대한 어렵게 만들어 놓고 이를 해결하는 것을 즐겼어요. 그래도 이창호와 둔 바둑은 대부분 제가 진 바둑일텐데 베토벤 소리를 듣기가 부끄럽네요. 학구파로 소문났었지만 베토벤처럼 노력을 하지는 못 했어요. 실제로 전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큰 효과를 봤어요. 모짜르트는 누구일까요?"
모짜르트의 음악에는 궁중연회, 귀족연회의 배경이 될 만한 경쾌하고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베토벤은 음악회에 어울리게 좀 더 전문적이고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유 교수는 모짜르트를 조한승에 비유했다.
"조한승이 모짜르트에요. 그의 바둑과 모짜르트의 음악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요"
이쯤 되면 이창호와 이세돌의 스타일은 과연 누구에 비길 수 있는 지 아니 물어 볼 수 없겠다. 물어봤더니 금방 답이 나온다.
"이세돌의 스타일은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난해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현란합니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하느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창호는 '바흐'에요. 한평생을 자신의 분야에서 정진하는 느낌이 비슷합니다. 바흐의 음악은 종교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창호도 '종교적인 경건함' 같은 그런 분위기가 강합니다. 유창혁 9단의 성격은 모짜르트 처럼 밝고 낙천적이라고 들었는데요. 그의 바둑은 브람스가 생각납니다. 앞선 선배들을 닮고자 했으나 본인만의 깊이와 무게, 세련됨이 있습니다."
○● 리스트, 사랑의 꿈 (Liszt -- Liebestraum) 유영욱 '이세돌은 리스트'
○● 모짜르트(Mozart:Piano Sonata in C, K. 545 1st mov) 유영욱 '조한승은 모짜르트'
이야기가 깊어지다보니, 새삼 프로기사와 피아니스트가 닮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인생을 한 분야의 테크닉과 가치에 몰두했으며, 이로써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고수'라는 숨겨진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만 이러한 면모를 제대로 알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항시 갈구한다. 흔히들 명창(名唱)과 명청(名聽)이라 부르는 그런 것 말이다. 클래식 분야의 전문가들 또한 스스로의 음악을 들어줄 수 있는 저변 확보에 신경을 많이 쓴다. 바둑계에서 아마추어 바둑팬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처럼.
물론 다른 점도 많다. 가장 큰 게 이거다.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하는 것이지 '승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 교수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아, 좋다'라는 느낌이 들게하는 그런 것, 그것이 바로 음악입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거죠. 금난새 선생님이 대중과 소통하는 작업을 많이 하시는데 같이 협연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음악에선, 피아노에선 유명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제가 베토벤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지만 마침 심사위원들이 제 연주 성향과 취향이 굉장히 비슷했던 겁니다. 운도 작용한 거지요.(이런 겸손을...) 유명 피아니스트가 못 되었어도 피아노를 배운 사람들은 각자 여러가지 계층에서 자기 일을 할 수 있어요. 프로기사들은 어떤 큰 승부에서 이겨서 완전히 뜨기도 하고, 지게되면 급격히 무너지기도 하지만 피아노 연주는 승부가 아니죠."
피아노 연습곡, '에뛰드'를 연주하는 것은 피아니스트의 자부심이기도하다. 에뛰드를 바둑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대답에 주저함이 없다. "에뛰드는 복잡한 바둑사활"이란다. 사활문제는 바둑의 한 판 전체를 구성하는 미학은 없어도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정확히 수를 읽느냐는 것"처럼 바둑을 잘 두기 위한 강한 실력을 연마하게 해준다. 에뛰드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눈보다 손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것을 칠 때 '나는 고수다'하는 느낌이 있냐 물었더니, 그냥 슬쩍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해준다. 어째 그냥 맞장구 쳐준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했다.
○● 쇼팽 에뛰드 - 유영욱 "바둑의 사활문제가 바로 피아노의 에뛰드"
피아니스트는 매력이 있다. 바둑도 매력이 있다. 둘의 매력이란 무엇일까?
"섹시함입니다"
다들 놀라는 표정을 짓자 유영욱 교수가 웃는다.
"표현을 세게 했나요. 유럽에서 철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어요. 사색하는 철학자가 매우 '쿨'해 보인 겁니다. 재능있는 젊은 사람들이 철학을 전공했어요. 이건 패션처럼 항시 달라져요. 미국에서 공부 잘 하는 게 아주 쿨하진 않아요. 오히려 잘 놀고 유머있고 운동 잘 하는 게 쿨하다고 느끼죠. 바둑에 집중하는 모습도 그렇게 쿨하게 보이면 되요. 다른 사람에게 섹시해보여야 합니다. 멋진 거죠. 그러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바둑을 배우고 싶을 거에요."
"몇 시간짜리 장고보다 라이브로 전해지는 바둑 승부는 확실히 짜릿하고 볼 만하더군요. 한국기원을 직접 찾지 않아도 되고 양총장님 해설을 듣고 좋아할 수도 있었구요. 바둑을 후원하시는 분들이나 클래식을 후원하시는 분들이 비슷한 경향을 가진 것 같아요. 또 그 저변은 그런 매력을 갖춰서 가꿔가야죠."
지금 '고깃집 유래회관 6호실'에서 천진하게 고기를 구워먹는 이 피아니스트는 무대위에서 그의 말대로 '섹시'하게 변신한다. 눈을 감고 천천히 음악과 연주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시각적으로도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가장 늦게 자리에 합석했던 김효정 2단이 입을 뾰루퉁하게 모으며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렇게 내 앞에 늦게 나타났냐고?" -다들 웃는다. 김 2단이 마지막 한 점을 집어먹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기 냄새를 털며 유래회관을 나선다. '쇠고기 소나타' 이런 피아노 곡은 없나? 이날의 대화가 마치 그런 느낌이다.
▲ "아니, 왜 지금 나타나신 거에요?"라는 김효정의 재치에 유영욱 교수도 크게 웃었다. 만삭의 김효정 2단은 다음달 출산 예정
.gif){kind=logo}
유영욱은 9살에 피아노를 만졌다. 그리고 10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으로 직접 피아노 곡을 작곡해 사람들 앞에서 연주한 바 있다. 최근의 콘서트에서 그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다음 달 출산을 앞둔 김효정 프로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다. 김효정 프로 부부와 유영욱 교수는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현재 유영욱 교수의 기력은 인터넷 바둑의 짱짱한 4단(오로바둑 기준)이다. 
테트락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