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왕후의 걱정이 어딨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가만히 웃었지만 미실이 내금위장(內禁衛將) 손물재에게 연락을 취한 건 전장에 나선 설원랑을 불러들이기보다 궁원(宮苑) 전체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려는 의도였다. 대왕의 일개 후궁이지만 미실이 남당의 호위책임을 맡은 내금위장을 움직여 왕후와 맞먹는 권력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삼한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나는 옥새의 주인인 새주(璽主)다, 신국이 나의 수중에 들어오고 있으니 아이를 낳기 전 조정의 실세(實勢)를 끌어당겨야 한다.’

조정의 실세. 우선적으로 지소태후를 따르는 자들이다. 태후의 후광을 쬐자면 무엇보다 재물이 있거나 권세가 있어야 한다. 권세는 병부(兵部)와 연관있는 것이니 가야정벌에 앞장 선 이사부(異斯夫)를 따르는 인물이 그들이었다.

힘 있는 자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역사서를 비롯해 세상에 알려지기론 지소태후의 망상이 가야정벌을 꿈꿔 장수들을 자신의 치마폭으로 감쌌다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권세를 휘두르는 자가 기간을 연장하거나 많은 재물을 원할 때엔 전쟁을 치를 재물을 추렴해 상대국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얻은 노획물을 수입으로 잡는다. 자신이 낸 비용의 다섯 배나 열 배 이상의 수익을 가져와 힘 있는 자는 얼마든지 도박할 수 있는 사업의 하나였다. 지소태후 곁엔 등에처럼 붙어있는 그런 인물이 적지 않았다. 그게 첫 번째 과녁이었지만 미실은 은밀히 조사만했을 뿐 시행치는 않았다.

월성엔 하나둘 생각밖의 소문이 튀어나왔다. 미실이 깊은 산에 들어가 죽음을 택했는데 천신(天神)의 보살핌으로 살아왔다느니, 저승에 올라가자 삼신산(三神山)에 머물던 칠성노인이 아직 명이 다 되지 않아 인간 세상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소문이 휘몰아칠 때마다 미실은 미소만 머금을 뿐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런 것과는 달리 소문의 냄새가 하나씩 풍길 때마다 지소태후는 이마를 찌푸린 채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삼일산(三日散)이란 ‘무고(巫蠱)’는 사흘이면 끝나는 걸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흐음, 그 요망한 것이 옹추공을 이용해 가야명주를 먼저 보내 내가 마신 걸 알고 당당히 들어왔겠다. 요망한 것, 내가 어찌 나올 걸 알았기에 그리도 당당했단 말이지. 내가 주상에게 했던 말이 모두 무고(巫蠱)의 힘으로 무당의 푸닥거리에 놀아났단 말이지. 고얀 것, 내 어찌 널 두고만 보리!’

지소태후는 말이 없었다. 미실이 궁에 돌아온 날부터 두 달 가까이 흐른 지금도 말이 없었다. 그녀가 꾸며온 일들이 하나둘 궤도를 벗어나 미실 쪽으로 기울고 측근들이라 믿은 원로 중신들이 하나둘 멀어짐을 느꼈다. 설약사는 그 점을 우려했다.

“태후마마, 조정의 사정이 달라지고 있나이다. 공이 있는 자에게 대왕께서 용양신(龍陽神)을 내렸사오나 지금은 선아부(仙娥府)에서 스물 안팎의 계집들을 직접 보낸다고 하옵니다. 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선아부는 미실의 측근들이 만든 것으로 조정의 중신들을 색(色)으로 엮는 부서가 아니겠는지요.”

죽음이 멀지 않은 자들이지만 그들은 한사코 색을 밝힌다. 사내에게 있어 ‘색’은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 집에는 오래 살 수 있는 비술과 비약의 연구가 주인을 위해 끝없이 연구 발전시키는 정보가 필요했다.

미실은 그 점을 가볍게 이용했다. 자신이 새주(璽主)지만 그걸 이용해 권세의 지름길을 만들지 않았다. 봄이 되면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순리의 봄바람이 불어들길 기다린 것이다. 사사(四四)가 내미는 새로운 주장에 그녀는 신경을 곧추세웠다.

“이곳 보명궁의 주인이시니 당연히 궁주(宮主)가 되시는 게 마땅한 일이나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호칭이 아닌 탓에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하오나 이미 대왕마마의 명이 떨어졌으니 선아부(仙娥府)의 주인이십니다. 그것만으로도 낭주께서 궁주님이 되신 건 당연한 일이옵니다.”

“사사는 약사로서 보명궁에 머무는 게 아니라 했던가. 네가 좋아하는 게 역사(歷史) 살피기라 했는데 그 동안 뭘 살폈는가?”

“소인은 신국의 바탕을 이루는 문자와 유희(遊戱)에 대해 관심이 많았나이다.”

“유희?”

“예에. 아득한 날 우리의 선조들은 중원의 천산으로 일컫는 태산(泰山)을 움직이는 종족이었나이다. 안과 밖의 강성함으로 동이(東夷)라 하였는데 ‘이것은 활을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동이의 이(夷)는 오랑캐 이가 아니라 ‘쇠를 잘 만지는 이(金+夷)’였나이다. 그 사실을 중원 사람들은 오랑캐 이(夷)로 바꾸어 우리를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 하였나이다. 비록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 반도에까지 밀려왔습니다만 우리 민족은 천하를 경륜하던 때가 있었나이다.”

“그게 내가 필요한 것이냐?”

“궁주님, 권세를 잡는 것은 분명 뜻한 바가 있어야 합니다. 신국의 주인이 되고자 했으면 그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소인이 앞에 내놓은 건 천축(天竺)에서 전해진 주사위라는 것입니다.”

“오호!”

“이 주사위를 던져 길흉을 살피는 점법도 있습니다만 이것을 던져 놀이판을 벌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선아부(仙娥府) ; 20세 이전의 처녀들을 용양신으로 사용하기 위해 양성하는 기관

▲용양신(龍陽神) ; 남색으로 이용하는 사내

▲천축 ; 서역

▲상아주사위가 발견된 인왕동 우물은 기타 여러 자료등을 볼 때 12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