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에겐 당장에 움직인다는 것이 멋쩍은 일인데다 후궁(後宮)에 관한 일이기에 큰소릴 내는 것도 마뜩찮았다. 그러나 지소태후가 어떤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사도왕후가 보내온 서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태후께선 누구보다 권력의 맛을 아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상대를 위로할지 모르나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을 이유로 미실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르니 어찌한다, 낭주를 구할 묘책이 없는가?’

엄밀히 보면 이것은 진흥왕이 넘겨짚은 것이다. 모든 것으로 볼 때 미실에게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왕에게 비책을 내놓는 대전약사도 자리를 빈 상태였기에 대왕은 홀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한다는 건 해로움만 있을 뿐이다. 무엇을 바라고 기다릴 것인가. 태후마마의 머릿속은 온통 미실을 죽이는 방법만 꿈틀거릴 것이니 우선은 그녀를 살려내는 게 급선무다.’

마음을 정하니 더 이상 꿈틀거릴 수는 없었다. 남당(南堂)을 수호하는 어림군(御林軍)의 수장 손물재(孫勿哉)를 급히 불러들였다.

“과인이 장군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니오. 연전에 미실 낭주가 죄를 짓고 몸을 피했는데 지금 태후마마의 처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장군은 어림군을 이끌고 한시바삐 그곳으로 달려가 죄인을 나포해 오시오.”

“명을 따르겠나이다!”

손물재가 급히 물러나가는 것을 보며 진흥왕은 주위를 서성이며 기다릴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시각, 미실은 어떻게 지냈는가. 여느 때완 다르게 태후전(太后殿)에 들어서자 기다렸단 듯 이슬차가 청자 잔에 다소곳이 채워졌다.

“새주(璽主)가 즐겼던 이슬찹니다. 어서 드세요.”

“예에, 마마. 새주란 말이 죄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명칭인 듯 싶습니다.”

“오호호호, 죄인이라니오. 당치않습니다. 내가 이 나라 신라를 신국(神國)으로 만들었습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주춧돌을 놓은 것이지요. 그러니 특별한 일을 했다곤 볼 수 없습니다. 월성(月星)은 반월의 기운이 차고 넘치니 음기(陰氣)가 충만하다고나 할까요.”

“그렇기에 태후마마 같으신 분이 오래도록 강녕하여 다스리심이 좋을 것으로 봅니다.”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말이에요. 모든 게 주상에게 넘어갔으니 모든 걸 부처님께 의지하고 여생을 편히 보내고 싶습니다. 주상이 건강을 되찾았지만 월성의 음기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으니 내명부에 설치한 여러 기관을 건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소태후의 혀끝이 가리킨 곳은 상음각(上陰閣)과 하음각(下陰閣)이었다. 상음각은 조정에 출사한 중신들의 자식들로 일종의 성교육(性敎育)을 받고자 들어온 곳이지만 하음각(下陰閣)은 골품을 받지 못한 일반 양민의 딸들이 미색으로 출세해 집안을 일으키고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신국(神國)이란 게 뭔가? 여인이 제 몸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내를 홀리는 방중(房中)의 기술이었다. 법흥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흥왕은 불과 여덟 살이었다. 그 나이에 보위에 오르다 보니 전권(專權)을 쥔 태후의 섭정은 수렴청정으로 휘몰아갔다.

왕성한 모권(母權)의 뼈대를 ‘신국’이라는 가상의 나라로 완성시킨 것이다. 이것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내가 있어야 하고 그 사내를 인도해 나갈 여인이 필요했다. 겉으론 아무런 효능이 없어 보였지만 여인의 힘은 대단했다.

‘신국’이란 주춧돌은 당연히 여인이었다. 지소태후는 그 점을 말하고 있었다.

“월성의 사람들은 내가 새주(璽主)를 미워한다고 하나 그건 잚못 전해진 것이오. 나는 그대의 할머니 옥진궁주와 연적(戀敵)이었긴 하나 좋은 상대라고 생각했지 미워한 건 아니야. 내 맘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건 질투심이었을 게야.”

지난 일을 더듬는 지소태후를 볼 때 그런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 보니 손녀인 미실을 미워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알 수 없는 미실이 몇 가지 잘못을 범하는 바람에 상태가 나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태후는 자신이 그녀를 미워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보세요, 새주(璽主). 내가 한때 새주의 어여쁨을 투기해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오. 허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정녕코 새주를 미워하지 않았소. 아시겠습니까?”

“태후마마, 쇤네는 마마께서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해도 원망하진 않습니다. 마마의 여생 동안 부서지고 구부러진 신국(神國)이 올곧게 펴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또한 쇤네는 보명궁으로 내려가 비명에 세상을 떠난 태자마마의 극락왕생을 위해 불문(佛門)에 귀의해 당시 보명궁에 출입한 인사들을 불러들여 위로할까 하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오.”

“태후마마, 월성은 여인네 기운이 왕성하나 뭣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기운이 막혀있다고 들었나이다. 마마께서 신국의 완성을 위해 온 힘을 다하리라 봅니다.”

“오, 고맙소.”

그때 어림군이 밀어닥쳤다. 왕의 집무실을 위주로 경계를 펴는 자리이기에 대단한 위세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쉰 명이었지만 이곳에 온 것은 수장 손물재를 비롯한 여나믄 명이었다.

“대역죄인 미실은 어명을 받들라!”

▲어림군(御林軍) ; 왕의 호위를 맡은 군사

▲상음각(上陰閣) ; 내명부에 있는 귀족이나 왕족의 딸들을 성교육 시키는 기관

▲하음각(下陰閣) ; 골품이 6두품 이하의 민간 여성이 성교육을 받는 기관

▲초기 청자로 알려진 녹청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