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지소태후가 왕주(王酒)를 마신 걸까. 술에 풀어놓은 고독(蠱毒)이 태후의 이성을 갉아 본래의 정신이 바뀐 것일까. 한동안 미실을 바라보던 태후에게서 뜻밖의 말이 새어나왔다.

“너흰 어사대 관원이 아니냐? 한때의 잘못된 명으로 미실이 새주(璽主)의 신분을 버리고 산중에 숨은 것이다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런데 너희가 그 옛날의 정령(政令)을 기억해 감히 새주를 나포한 것은 왕실을 욕보이는 어이없는 일이다.”

어사대 판관 설추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지소태후는 손수 왕의 집무실 남당(南堂)에 나타나 왕실안팎의 관장들을 불러 모아 일대 훈시를 내렸었다.

“경들은 정작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 어이하여 그대들은 나를 패역죄인으로 몰아붙인 요망한 미실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뭣인가. 경들의 마음엔 그 계집의 요망한 짓거리를 아직도 두둔할 생각인가!”

어사대 판관 설추경은 미실 나포에 진전이 없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태후마마, 어사대 판관 설추경 아뢰나이다. 어사대에선 그 동안 서라벌 전역에 수사진을 급파해 죄인 나포에 힘을 기울였으나 달포를 전후로 한가위 명절이 있기로 대왕께선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점 때문에 잠시 수색을 중단한 줄로 아옵니다.”

그것은 알고 있었다.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진흥왕은 태후가 기거하는 곳을 찾아와 명절을 기해 잠시 미실 찾는 작업을 멈춰야겠다는 얘길 했었다.

“태후마마, 잠시 노여움을 그치시고 소자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뭡니까?”

“동륜태자가 개에 물려 죽은 것은 댕견을 관리하는 자의 잘못이지 그 사람의 허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라니오? 미실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마마마.”

“이보세요, 금상. 요망한 그 아이는 어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죄인입니다.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기 전에 왕궁을 탈출한 요망한 계집이에요. 한데, 그 계집을 두둔하세요?”

“어마마마도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왕후와 맞먹는 새주(璽主) 신분입니다. 어마마마께서 천거한 남도의 연회에서 소자에게 즐거움을 안긴 공으로 새주(璽主)가 됐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어미의 세력을 막는다고 그 옛날에 없앤 원화제도(源花制度)를 살려 그 아이에게 화랑을 통솔할 권한까지 줬지요?”

“그건···.”

“왜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까. 금상과 배다른 형제 세종 전군에게 던진 풍류주가 걸렸습니까? 그렇기에 나라의 중책을 막고 적들과 변경에 대치한 세종 전군을 불러들인 게 아닙니까.”

“···.”

“난 그렇습니다, 주상. 아무리 중신들이 좋다 해도 내 살붙이만은 못합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울 수 있는 건 내 살붙입니다. 그런데 주상은 어쨌습니까. 내 부모 형제보다 요망한 대원신통의 허섭스레기 같은 미실에게 빠졌지 않습니까.”

한가위를 앞둔 시점에서 진흥왕은 더 이상 일을 확대하지 않고 얼마간이라도 조용히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당시 지소태후는 어쨌는가. 당장에 잡아들여 요절을 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행동을 보였었다. 그것을 가까운 곳에서 직접 몸으로 느낀 게 엊그제였는데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동안 어디 계셨소? 내가 알기론 홀몸이 아닌 것 같은데 고생이 심했을 것이오.”

“아니옵니다, 마마. 태후마마의 염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나이다.”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아직 출산이 멀었다지만 아무 말이나 듣는 건 뱃속 아이에게 이롭지가 못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이슬차라도 한 잔 하십시다.”

어사대 판관 설추경은 귀신에 홀린 듯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미실을 잡지 못해 아랫것들이 보는 앞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가.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어찌 저토록 달라질 수 있는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이 일이 어찌 설추경 혼자만의 의문이겠는가.

남당에서 집무를 보는 진흥왕도 마찬가지였다. 태후의 행동에 이상이 있다는 말에 사도왕후는 급히 차자(箚子)를 보내 행동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대왕마마, 급히 아뢸 것이 있어 차자를 보내나이다. 지금 미실이 궁에 들어왔음을 태후께서 아시고 어사대 판관 설추경으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였는데 예전의 은원(恩怨)이 있었음에도 내색치 않고 자식처럼 받아들였다 하옵니다. 날씨는 가을의 한복판에 있으니 태후마마가 절기 탓으로 이상이 생겼다고 보긴 어려우나 이전과는 다른 행동이기에 대왕께서 각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평소 지소태후의 지략으로 볼 때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른 행동을 할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의 당부였다. 사도왕후와 마찬가지로 진흥왕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태후가 자신의 처소에서 미실과 차를 마시고 있다는 보고에 진흥왕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새주(璽主) ; 사도왕후와 똑같은 위세

▲남당(南堂) ; 왕이 공무를 보는 곳

▲차자(箚子) ; 간이 상소문

▲유리고배는 외국과 교역할 때 들여온 것으로 유리 술잔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