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추공은 집으로 돌아와 월성에서의 일을 미실에게 들려주며 자신도 양온서(釀醞署)에서 가야 명주를 생산하는데 관리 · 감독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내가 잃은 관작(官爵)을 다시 찾았으니 개인적으로는 나의 영예이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미실 낭주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태후마마께서 왕주를 시음(試飮)하고 계시니 당장에라도 대왕마마가 자리를 같이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옹추공은 왕주가 어떻게든 태후와 대왕의 침전에 이르게 해 달라는 미실의 당부를 생각해내고 한 말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신신당부한 미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한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칠사와 아기 역시 월성에 들어갈 수 있으나 아기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처음에 정했던 ‘비담(琵曇)’ 대신 비담(毗曇)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태후마마께선 아이의 근본을 모르나 왕주를 제조한 공을 인정하기에 그나마 허락한 것이지요. 아이는 자식 없는 왕족 중에서 부모를 골라 내일 중으로 사량궁(沙梁宮)에 들어갈 것이오. 그러나 저러나 낭주께선 어쩔 셈입니까? 왕궁의 흐름이 낭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들어가시겠소?”

“들어가야지요.”

“?···.”

“살고 죽는 건 이미 하늘에 맡긴 지 오랩니다. 그렇다보니 하룻밤을 기다리는 게 오히려 마음에 짐이 됩니다. 차라리 지금 당장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저에게 사는 수가 있으면 오늘 일어나겠지요. 그렇지 않는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지요. 소인도 이번 일이 잘못 돼 태후마마께 신임을 잃으면 앞으로 월성 출입은 통제되겠지요. 다만, 낭주의 장담처럼 모든 게 잘 풀리면 월성에서의 생활은 기름지리라 봅니다.”

일각(一刻)이 못 돼 가마행렬은 월성을 향해 움직였다. 낙엽이 지는 계절은 아니었지만 가을비에 젖은 나무 잎새들이 술 취한 듯 자지러지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 보명궁에 당도하자 시비(侍婢)와 봉사랑(奉事郞)이 기암이라도 할 듯 놀랐다.

“아니, 미실 낭주?”

“떠들 것 없다. 너희 둘은 태후마마 처소와 왕후마마께 이 사실을 알리고 하회를 기다려라.”

두 시비는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지소태후가 있는 태후전(太后殿)과 월지궁을 향해 달려갔다. 요란한 발짝소리는 한 시각이 지나기 전에 들려왔다.

“미실 낭주는 왕명에 의해 수배됐으니 밖으로 나와 오라를 받으시오!”

목소리를 듣자 하니 어사대 판관 설추경이었다. 잠시 잠깐 사이에 동륜태자를 살해한 범인을 놓치고 궁색한 처지에 빠졌었다. 그러한 설추경에게 촉촉한 소식을 전한 건 보명궁에 머무는 오리(吾里)라는 시비였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대왕의 추상같은 어명만을 기다리는 처지였는데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길 줄은 뜻밖이었다.

‘으흐흐흐, 사람이 죽는 법만은 없다던데 그 말이 실감나는구먼. 지금이라도 저 요망한 계집을 잡았으니 내가 죽는 일은 없겠어. 으흐흐흐.’

설추경은 죄인을 압송해 가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지만 미실은 시골 아낙처럼 검소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어사대 관원들을 따라나섰다. 보통의 죄인이라면 의당 어사대 지하 뇌옥에 갇혀 곤욕을 치르는 게 첫 단계지만 미실은 달랐다.

그녀의 죄는 신국(神國)의 동량이 되는 태자를 댕견으로 물어죽인 것이니 이것은 극악무도한 반역의 죄상이다. 그렇다 보니 지소태후의 당부처럼 미실이 나타나자 그녀를 태후전(太后殿)으로 끌어간 것이다.

“태후마마, 어사대 판관 설추경이옵니다.”

닫힌 방안에서 물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연전에 개에 물려 태자마마가 세상을 버린 일은 모두 미실 낭주의 허물로 밝혀졌나이다. 미실 낭주가 웬만큼 날짜가 지나 왕궁에서 전날의 허물을 잊은 것이라 보고 보명궁에 들어왔기에 소인이 이곳으로 호종해 왔나이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문이 열리고 지소태후가 나타났다. 이전보다 약간 야윈 듯 살이 빠진 몸맵시다. 여전히 혈색 좋은 태후의 낯빛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상대를 경멸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기는 것도 아니었다. 지소태후의 눈빛은 웃을 듯 말 듯 자신을 노려보는 미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양온서(釀醞署) ; 술 만드는 관청

▲신국(神國) ; 신라

▲고배(高杯) ; 고배는 금으로 만든 술잔으로 신라와 가야인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