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상산사호도'를 벽화로 채택한 경우는 매우 희소하다. 산천재, 관덕정, 구룡정 벽화 등 몇 건에 불과하다. 필자가 산천재 벽화를 주목한 것은 연대가 가장 앞섰기 때문이다. '이덕일'은 신문 칼럼에서 산천재의 사호도(四皓圖) 생성 연대를 남명선생 당시의 일로 치부하고 선생의 은일사상의 방점을 찍기도 했으나 산천재 벽화의 생성은 정조20년 남명유허지 중건 당시 제작된 것으로 17세기 초의 작품이다.

사호도는 평화기에 은거하고 혼란기에 출사하는 지식인의 덕목을 상징하는 것으로 산천재의 덕목과 부합한다. 남명사상은 행동하는 지식인상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런 남명사상도 당시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퇴계는 남명의 은거는 존중하면서도 실천력이 떨어지는 노장사상에 가깝다 깎아내리는 평가를 한 바도 있다. 물론 이 평가는 곧바로 시정된다. 임진왜란 반발시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의병활동을 한 문파가 남명문중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쉽게도 남명선생과 직접 연결된 바둑담을 찾지 못했다. 다만 같은 시기 지리산 서쪽 장성땅의 황룡강가로 물러나 살던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 )의 바둑담 한편을 미루어 남명선생의 바둑담을 짐작해 본다. 하서 김인후는 여러모로 남명선생의 면모와 닮은 인물이다.

돌산에서 평평한 곳 찾아

대나무숲에 거처를 마련하고

손님이 찾아 와 한판 바둑을 청하면

돌 놓는 소리 산중을 울리네.

(石岸梢寬平/竹林居一半/賓來一局碁/釉雹空中散)

김인후가 백양산 자락의 황룡산에 은일할 때 남명선생은 지리산 자락 산천재에 은거하며 공부하고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선생은 은일중에도 자신의 방안에 있는 칼에 명(銘)을 새겨놓고 바라보았다.

안으로는 경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는 의로 시비를 끊어 내겠다.
(內明者敬外斷者義).

경과 의로 한 세상을 살겠다던 선생의 칼같은 기개가 분출된 사건이 당대의 최고 권력자 문정왕후에 대한 성토였다. 선생은 어린 임금 명종을 쥐락펴락하는 문정왕후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왕후는 심지가 깊은 여인일지 모르나 겨우 궁궐안의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선왕의 어린 자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서슬퍼런 독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발언으로 당시대 조선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나이어린 임금과 문정왕후와 친척부치인 파평윤문의 전횡을 통박하는 발언은 당시대의 메시아(?)의 목소리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만들어진 산천재 중수기에 선생의 인간적 면모는 잘 갈무리되어 있으면서도 사호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유감이다. 바둑이 조선후기로 오면서  잡기라는 인식을 얻은 이유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거창과 산청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서 유불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도교와 불교가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따라 바람처럼 날아갈 길이 있다지만, 현실 속에서 모든것을 구현할 수밖에 없던  유교의 자기모순의 반복의 딜레마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본다.  바둑은 동양문화가 만들어낸 기적의 게임이다. 하여 바둑은 유불도에 공히 투영된 거울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