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落終局
날은 저물고 바둑은 끝났다.

장유(張維 1587-1638)라는 사람이 있다.
시조 누구의 몇 대 손으로 누구의 손자이자 누구의 아들이란 등식을 죽 늘어놓는 고대의 어법을 따르면 청류 '김상용'의 사위이자 효종임금의 장인이 되니  이 사람의 역량(?)이 짐작 될 것이다. 든든한 배경만큼이나 실력도 출중해 조선중기의 고문사대가(四大家)의 한명으로 불린다. 그가 남긴 문집 '계곡만필'은 바둑마니아 장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삼백 알 바둑돌 놓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

빨리 저무는 해 아쉬웠네

바둑 둘 사람 없어 꿈속에도 아른아른

엎치락뒤치락 번민이 슬퍼질 뿐.

(三百枯碁局局新 每愁詹日易斜中. 碁坪夕閣空勞夢. 番羽覆無端只可悲)

인생과 바둑이 절묘하게 녹아든 아름다운 시다.
이 시는 장유가 목천현감으로 떠나는 바둑친구 박자건(朴子建)에게 준 시와 그의 또 다른 시를  필자가 임의로 조합(?)한 시(詩)다. 장유에게는 불경한 일이지만  바둑이라는 우산 아래서 필자의 치기(?)를 이해 하시리라 믿는다.  필자는 1천 편이 넘는 우리 바둑 한시(漢詩)를 수집했다. 고려시대 '동인홍'부터 근대의 '정인보'까지 바둑을 노래한 한시가 천 편이 넘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바둑을 노래한 많은 시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장유는 단연 돋보인다.

바둑판 위에 한 점 한 점 돌이 놓여지는 순간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는 구절은 경탄이 절로 나온다. 바둑 친구를 만나 바둑 몇 판 두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쉬움에 꿈속에서도 바둑판과 바둑돌이 아른거려 밤새워 몸을 뒤척였다는 구절은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렇다. 장유의 시어는 정곡을 찌른다. 비유하지 않고 단박에 핵심을 찌른다. '만리강산일국기(萬里江山一局碁)'류의 중국의 작품류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장유는 30여 편의 바둑시를 남겼는데  참으로 혼자 감상하기 아까운 작품이 많다.

(가) 한판의 바둑마냥 모든 것이 사라졌다(萬事消磨一局碁)

(나) 삼백알 바둑알로 국면을 정리하고(三百碁殘收局面)

(다) 바둑으로 한 세상 시름 덜어내고( 閑愁生付碁局 )

(라) 복잡한 세상 일 한판의 바둑이고(紛紛世事一坪碁)

위의 시어들은 필자가 장유의 바둑시 중에서 한 구절씩 뽑은 것이다. 그중에 국면(局面)이란 단어가 나온다. 언젠가 필자가 바둑에서 비롯한 '국면'을 언급하자 어떤 바둑기자란 사람이 '아전인수'라 코멘트(?)를 날리던데,  이 14세기 기록으로 답을 대신한다. 더 필요하다면 당나라(?) 기록도 보여 주겠다.

장유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고통을 받을 때 공조판서로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연구자들은 장유를 양명학과 노장철학에 경도되었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장유가 양명학과 노장사상을 심취한 개방된 사상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양명학과 노장사상은 근본주의 유학과 많이 다르다. 원칙에 목을 매는 근본주의 유학과보다 인간주의로 경도된 것이 그렇다.

바둑을 두고 술을 즐기고 시를 짓는 음풍농월의 장유의 삶을 보면 일견 연구자들의 주장이 맞는 듯하다. 그러나 장유는 어쩔 수 없는 유학자다. 남한산성에서 패한 후 포로로 심양에 끌려갔던 며느리가 돌아오자 며느리를 내쫓는 일에 십여 년을 몰두한 사람이 장유다. 장유는 아들의 이혼과 재혼을 허락해 달라며 10년간 송사를 벌인다. 이에 최명길의 반론이 명징하다. 최명길은 장유의 오랜 친구였다.

예전(임진왜란)에도 이와같은 일이 종종 있어 소환하여 돌아온 아내와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보고 명문귀족을 유지한 사람들이 있으니 이것은 예가 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때(방편)에 따라서는 도리(法)도 달리  적용할 수 있습니다(豈不以禮出於精隨時異宜).  맹목할 일이겠습니까?  -인조실록 16년 3월11일 자.

장유는 14세기를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성리학이니 양명학이니 하는 틀속에 넣고 무엇인가를 말하다 보니 자연스럽지 않은 점도 있는 것이겠다. 장유는 사상의 틀을 거부한 사람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동시에 그의 문집 속에 많은 바둑담이 남아있는 이유기도 하다.

주자는 박람요약을 종지로 삼고

육상산은 단순함을 즐겨했다네

어찌 한 스승 공맹을 스승 삼고

결론은 이리도 멀어졌는가.

본래는 같았으나 흐름이 달랐으니

누가 진정한 공자의 문하인가.

(朱宗博約. 陸慕簡易. 何同師孔孟. 而旨歸硃致. 源同流異.熟眞洙泗)

장유가 주자와 견준 육상산은 바둑판 위에서 하도낙서를 깨달았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