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역사의 모퉁이
2.  기다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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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기다린다는 것

아느냐. 나는 너를 믿는다. 나에게는 너뿐이다.
(道知也 余信汝 余足汝兮)


통치자의 덕목에 아랫사람을 감복시키는 데 이 발언보다 더 좋은 발언이 있을까. 정조는 이 발언을 매우 적절하고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 발언은 정조시대 인재군 대부분의 문집에서 볼 수 있는 멘트다. 서영보는 탁월한 행정능력으로 정조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고 정동준은 정조의 사상의 대변자로 훗날 벽파의 공격으로 그가 몰락하자 정조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절대적 존재였다. 김조순은 정조 사후를 대비한 자산(資産)으로 이 세 사람은 정조의 삼인방이라 할 수 있다.

낚시대회가 있던 날 밤 서영보는 정조의 부름을 받고 한 전각 안에서 누군가와 바둑을 두었다. 정조는 옆에 앉아 바둑판을 지켜본다. 그리고 며칠 후 서영보는 순환보직의 일환으로 철원부사로 발령을 받았고 정조는 서영보에게 시를 한 수 지어 섭섭함을 달랜다.


물이 휘돌아 흐르는 곳 정자 몇이던고
그대 주인되어 그곳으로 돌아가는구나
고깃배는 비를 맞으며 밀물을 따라 들어오고
바둑판은 주렴 아래서 종일 한가하겠도다.
상산의 네 늙은이들처럼 사는 것도 좋겠지만
반백이 너무 노인을 흉내내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닐세.
와유정에서 좋은 경치 감상 마다치 마시고
저녁풍경 그림에 남기는 것도 잊지 말게나.

(幾處空亭抱水環 / 見君今作主人還/ 漁舟帶雨隨潮晩/ 棊局當簾盡日閒
 宜把賀湖差待老 / 却嫌潘鬢未全斑/ 臥遊不妨輸眞境 / 莫惜幽居入畫間)


이 시는 정조가 서영보에게 준 시다. 한 나라의 군왕이 임지로 떠난 신하를 생각하며 이런 글을 써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인문적이고 인간적이다. 어떤 신하가 이런 지음을 받고 불충을 생각하랴. 서영보의 바둑은 그의 간찰에서 확인된다. 형에게 보낸 편지로 서영보의 바둑마니아 기질을 보여준다.

서영보는 정약용을 견제한 사실과 정조임금이 신하들을 깎아내리는 어투(?)를 문제 삼아 일부 필자들의 왜곡으로 인물상이 조금 뒤틀린 사람이다. 심환지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정조는 인재를 얻기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태공망과 이윤의 덕목을 잘 이해하고 또 정치에 이용하기도 했다. 심환지를 얻기 위해 7년여를 내치다가 발탁한 후 불과 두달 만에 10여 번의 보직을 바꿔주며 단련(?)도 서슴치 않는 강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병학지남 서문 정조는 병법서 서문에 바둑을 들어 병법을 말하고 있다. 자료 홍제전서)



낚시는 기다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바둑 또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게임이다. 물에 잠긴 주낙과 반상에서 승부를 다투는 한 수를 바라보는 시선도 같다. 눈뿐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같을 것이다.

정조는 말한다.

인재는 기댜려야 얻을 수 있다고,  때는 무르익어야 한다고. 천시와 인시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인내하고 기다리며 만드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