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 내려와 산 지 5년이 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세상사에 닥친 사업(事業)은 생업을 진 사람에게 모두 짐지워진 것이기에 별스런 일은 아니지만 어린 자식의 일은 조금 다른 듯 하다.

초등학교 5학년 잘 자라던 아이가 어느날 자력으로 일어서지를 못하는 장면은 부모 처지에서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입원과 투약 그리고 기나긴 검사를 거쳐 병명을 판정받고 치료 끝에 조금 회복되어 학교를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이 또한 주어진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지난 5년여를 연암 박지원 선생에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선생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은 것은 선생이 이 지역에서 군수생활을 4년여 했다는 이유로 혹시 지역 문화콘텐츠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이유였다. 특히 선생과 바둑의 연결점을 궁금해 하던 필자는 선생이 1797년 7월 당진 면천군수로 부임하는 길에 한양집의 큰아들 종의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고 무릎을 쳤다.

선생의 둘째아들 종채는 자신의 아버지가 바둑을 알았으나 두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고 과정록에 쓴 적이 있다. 선생의 수많은 기록 중 바둑에 대한 언급은 열하일기 1건, 박영숙에게 주는 글 1건이 전부(?)일 정도로 희소하다. 이런 상황이 선생과 바둑을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기록 하나가 더해져 3건이 되는 셈이다.

기보가 집 초당 선반에 있으니 찾아 보내거라. 해가 점점 길어지니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서 그런다.

(碁譜在於山艸堂梁上 覓付此回如何 日己漸長而消遺之資 實無如道理故耳)

- 서울대 박영철문고 소장 자료.

선생은 정조임금의 부름을 받고 희정당에서 하직인사를 하고 과천 평택을 거쳐 충청도 당진 면천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한양 집에 편지를 보내 두고 온 기보를 챙긴다. 선생이 수일을 걸어 면천성 밑에 도착한 시간은 마침 성문을 닫는 의식을 하는 때였다. 나발을 불고 북을 치며 성문을 닫는 모습이 선생은 영남의 그것보다 낫다며 칭찬을 한다.

선생은 부임지에서 만난 아전들의 얼굴이 반들거리고 간악스럽다 한다.

조선의 고급관료들의 아전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인색하다. 행정실무를 전적으로 그들에게 맡기고 의지하면서도 그들을 얄밉게 본 이유가 타당치 않다.

선생은 수령생활 중 무료할까를 근심하여 기보를 챙기기는 했지만 부임지의 생활은 결코 한가하지 않다. 선생은 부임 즉시 호서의 사도라 불리며 충청지역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부상한 서학주창자 이존창(1448-1801)을 대면하고 회유를 하며 정조임금에게 그의 구명을 요청하는 가 하면 당시 사회 지도층에 몇가지 주목되는 건의를 한다.

1. 서자는 부끄러운 자식인가.

2. 노비 해방에 대해.

3. 농지개혁을 하자.

이 세 가지 건의는 정조임금 박종악 김이소 등 당시대 최고의 권력들에게 직접 전달한 메시지였다. 박지원은 조선이 간난한 이유를 단 한줄로 압축해내는 통찰력의 소유자기도 했다.

팔도의 도로를 개선하여 물상이 전국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

선생은 교통의 미발달로 인해 전국의 물류가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 폐단에서 조선의 가난이 시작된다며 교통의 개선을 시급한 국가 과제로 지적한다. 박제가 등이 중국을 다녀와 했던 발언과 상통한다.

연암선생의 자료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선생은 지독한 독서광이자 기록광이었다. 그렇기에 조만간 선생의 바둑 기보 한장은 나올 거라 본다. 그 장면을 생각하면 그저 즐겁다. 필자가 그 장면을 현실화(?) 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