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사 말씀


필자는 지난번 부실하고 허접한 바둑문화만 남았다는 도발적인 발언을 한 바 있다. 이 발언은 필자를 포함한 바둑인들이  분노를 느끼기 전에 고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직언하지 못한는 관리는 간신이고 직필하지 못하는 문인은 매명가일 터이다. 직언과 직필하지 못하는 풍토의 세상은 어지럽기 마련이다. 문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문화비평 기구가 작동하지 못하는 곳에 근거도 출처도 없는 유성룡의 바둑담류가 생명력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근자에 이순신장군이 부활(?)하고 있다.

아산, 통영, 진해, 여수, 서산 등에서 장군의 이름을 내 건 축제와 세미나 예술제 등이 연중 열리고 있다. 해군에서도 사회의 장군에 대한 열기를 반영하듯 여러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순신장군의 문화 콘텐츠화인 것이다. 얼마전 여성프로기사들이 해군 해역사를 방문한 기사를 보았다. 군 바둑 보급활동 차원에서 해역사를 방문한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바둑을 좋아한 것은 바둑인들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장군의 바둑에 대해서는 한걸음 나가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장군은 몇 살 때 누구에게 바둑을 배웠으며 기력은 어느 정도나 되었을까? 장군에게 바둑은 어떤 의미였을까? 산의 형체는 아는데 그 산의 숲과 나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 답답한 일이다. 장군의 바둑담이 특정되어 있었다면 전국의 수많은 장군을 기리는 축제에 바둑이 한 꼭지를 당당하게 차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장군의 고향이자 이순신축제를 매년 개최하는 아산시 축제 담당자의 토로이기도 하다.

1593년 4월12일.
맑다. 아침부터 예하부대에 여러 지시를 하달했다. 수색정찰을 나갔던 나대용 김인문이 복귀했다. 점심을 먹은 후 우영공과 바둑을 두었다.
(晴. 朝各官公事題送 苒及羅大用金仁問歸營 食後 手談于右令公.)

장군의 일기 속에 바둑은 일관성 있게 수담(手談)으로 나온다. 장군은 위기, 기, 박혁, 오로, 좌은 등 바둑을 칭하는 많은 용어들 중에 수담을 택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장군은 적군과 대치한 긴장된 진중에서 다음날 또 바둑을 두신다. 그리고 일기의 하루를 더 소개한다.

1593년 4월13일.
비가 엄청나게 오더니 오전에 그치고 하늘이 맑았다. 이영공과 첨사 이홍명이 와 바둑을 두었다.
(雨大作 晩朝請 李令公及李僉使弘明 手談.)

1593년 9월 6일.
맑음. 새벽부터 목재를 운반하는 일로 분주했다. 배들이 출항한 후 식사를 한 후 우영공의 배로 가 종일 대화를 했다. 원공(원균)이 이상한 일을 꾸민다는 것을 알았다. 정담수가 말도 안되는 일로 장계를 올렸단다. 가소롭다. 바둑을 두다가 돌아왔다. 파손된 배의 목재를 추려 각 함선에 배분했다.
(晴 曉以船材運回事 諸船出送 食後 右令公船終日談話 因聞元公凶悖之事 不聞鄭聃壽無根造辭之狀 可笑 手談以還 破船材木 各船曳回)


일기 속에 보이는 장군의 취미는 바둑 술 그리고 활쏘기다. 장군은 휘하 참모 30여명 중 무려 18명과 바둑을 두신다. 이쯤되면 조선에서 바둑을 못두는 사람이 있었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바둑이라는 작은 창으로 장군의 일기를 읽으면 참으로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장군의 바둑은 한번쯤은 세상에 크게 공개돼야 한다고 본다.

논어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知者好之者不如樂之者) 말한다. 옹아장에 나오는 이 말은 체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고 즐기는 것보다 함께 참여하고 행동하는 즐거움을 한층 높은 경지로 생각했다.

'유득공'은 조선사람들의 음주가무를 실감나게 기록했다. 춤을 추는 것도 상대가 있어야 좋고 상대는 남녀를 가릴 일이 아니라 말한다. '유만공'이 말한 넓은 마당에 남녀가 한곳에 모여 손으로 하늘을 찌르고 발로 땅을 구르며 논다는 기록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유득공과 유만공은 다른 사람이다). 

유득공은 남자는 소매를 떨치고 여자는 손바닥을 뒤집는다(男拂袖女飜手) 했다. 참으로 신명이 있는 사람들이다. 신명은 참가하는 곳에서 나온다. 바둑도 고수들을 보는 것보다 스스로 두는 것이 좋다는 말도 이곳에서 나온다. 유본학은 바둑의 고수는 당대의 존경을 모으는 사람이라 했다. 글을 한평생 읽고 써도 바둑고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못한다 말한다.

바둑이 단순한 오락의 범주를 벗어나 하나의 예(藝)나 도(道)일 수 있었던 것도 노는 것도 유어예(遊於藝)라던 조선 식자들의 인식 때문이다. 바둑이 예도라는 말이 일본에서 나왔다는 말은 신용할 수 없는 말이다. '수담이 일본용어다'는 말도 근거 없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놀이에도 격이 있고 취미에도 품격이 있다고 한다.

- 향기는 멀리 풍기는 것을 취하고 술은 향기로운 것을 취한다. 거문고는 소리가 화락한 것을 취하고 지팡이는 친근한 것을 취한다. 물은 고인 것을 취하고 바둑은 그윽함을 취하며 칼은 겁나는 것을 취한다.

이유원은 정원용과 더불어 조선후기 둘째 가라면 서럽다할 바둑 마니아였다. 정원용은 바둑은 순(順)으로 승리하고 역(逆)으로 패하는 형세(形勢)가 근본이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이유원은 시서(詩書) 음악 그리고 기예를 통해 얻는 경지만이 진실로 '유어예'의 경지라 말한다. 이유원은 바둑을 통해 몸과 마음을 쓸 수 있다 말한다. 서유구가 말한 산수간에 초가삼간 장만하고 바둑 거문고를 들이고 책 만권이면 족하다던 유유자적도 이 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얼마전 바둑이 대한체육회의 정식단체로 들어갔다. 바둑이 예도의 옷을 벗어버리고 스포츠의 범주로 자청해서 들어간 것이다. 예도의 바둑에 시선을 주지 않는 사회의 주목을 끌기 위한 방편으로 스포츠를  택한 듯하다. 체육회(정부)의 지원과 고립(?)되어 있던 사회적 주목이 절실한 바둑계의 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다. 바둑의 승부 외적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했 던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것을 설파하지 못했다는 자책 말이다.

이 장을 끝으로 인사말씀을 드린다. 지난 5년여를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을 중언부언 하기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로의 회원들과 이 땅의 바둑바둑마니들, 사이버오로 그리고 정용진 님께 감사드린다. 건강하시라. 인연이 된다면 큰바다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그럴 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