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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힘들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을 날이 온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다.

이 빳데리, '참이슬’에 입사한 지 1년하고도 6개월, 날수로는 512일, 그 길고도 긴 세월동안 온갓 궂은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허구한날 봉다리의 헤드록과 백드롭, 암바까지 온갖 격투기 기술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남몰래 눈물 훔친 날이 그 얼마던가. ㅠㅠ

그런데 이런 날이 오다니... 월초라고 남들은 혀가 빠지게 고생하는데 바둑사이트를 여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이 특권 중에 특권을 감히 상상이나 해볼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입이 찢어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

이 행운은 우리의 존경하고도 존경하는 보스의 엄명 때문이다.

"봉다리. 빳떼리의 수치를 씻을 수 있도록 전격 지원해!”

이 엄명 하나에 나는 근무시간 내내 오로에 상주하는 특권을 받았다. 임무는 물론 단 하나다. 도토리! 이 좀마를 잡는 것이다. 오늘이 잠복근무한 지 벌써 3일째이다. 그런데 이 좀마는 콧뺑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지금 이 순간은 도토리가 문제가 아니다. 현재 오로에는 몽스님의 낑구기가 사우나의 열기만큼이나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낑구기! 이 악마의 게임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게임은 지극히 간단하다. 몽스님이 불러주는 이름을 특정 순번에 낑구는 사람이 당첨된다.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 일제히 이름을 부르는데 어떻게 그 순번에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1등을 뽑는다면 자신이 있지만..뒈질랜드 ㅡ.ㅡ;;

몽스님의 멘트가 이어진다.

- 봄맞이 특별 낑구기 마지막 문제. 문제는 우리재현. 9등 당첨. 또또 50개.

허걱! ☉.☉ 또또 50개!

또또 50개란 말에 오로대기실이 아수라장이 된다.

또또 50개면 목숨을 걸 수도 있다. 여기서 뼈를 묻자.

잽싸게 '우리재현'을 쓰고 엔터를 두들길 준비를 한다.

대기실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모두들 나와 같은 준비동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몽스님의 멘트만 나오면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가운데 손꾸락이 엔터로 내려 꽂힐 것이다.

낑구기는 타이밍의 예술이다. 너무 빨라도 안되고 늦어도 안된다. 9등이다. 9등이면 멘트가 나온 이후 정확히 0.3841초 만에 엔터를 두들겨야 한다. 0.3841초에서 단 0.0001초도 오차가 나면 안된다.

왜 0.3841초냐고? 국가기밀 사항이니까 자세한 건 묻지마 -.-;

암튼 대한민국 최고의 브레인 그룹인 KAIST에서 비밀리에 연구해서 만든 공식이니까 믿어도 될 거야. 어쨌든 그 타이밍을 잡으려면 눈도 깜빡이면 안된다. 눈 깜빡할 순간에 타이밍을 놓친다.

시선은 화면에 손가락은 바로 엔터 위에 초긴장 상태로 스탠바이 상태다. 긴장감에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그때 초긴장 상태의 침묵을 깨트리는 멜로디.

딩동..

"뭐야?”

얼핏 파란 글씨가 눈에 보이는 순간 일순 화면 가득 -우리재현-이 도배된다.

허걱! 낑구기...

엔터를 쳐보지도 못했다. ㅠㅠ 이런 우라질랜드..

아니지, 아니지. 지금 낑구기가 문제가 아니다. 아까 그 파란글씨는 웬지 낯익은..

잽싸게 옆의 대기실 창을 본다.

친구로 등록된 수없이 많은 초록색 대화명 중에 한명.

                         도토리

아.. 그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화명이던가.춘향이가 이도령을 기다린 심정이 이보다 더 애절했을까. 로미오가 줄리엣의 창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것이 이보다 더 간절했을까. 그 간절히 기다린 이름 석자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도토리다!!!”

내 함성소리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나한테 꽂았다.

모두들 너무 뜻밖의 소리에 도토리가 갖는 의미가 금방 연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놈입니다. 도토리!! 도토리라구요!”

역시 인생의 짬밥 수 때문인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우리의 보스다.100킬로그램이 넘는 그 육중한 몸이 저돌적으로 쇄도해 왔다.

그 다음은 봉다리다. 맨 구석에서 서류더미와 씨름을 하다가 패대기를 치고 달려온다. 근데 자세가 왜 저런지 모르겠다. 왜 헤드록 자세로 달려오는 건가. ㅠㅠ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와 똑같은 모양의 얼굴이 들이대진다. 모난리자다.

우리 막내. 지영이는 바로 내 옆자리에서 상체를 쭉 나한테 내민다.

샴푸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너무 므흣하다. ^-----^

"어디야. 어디!”

봉다리가 컴퓨터 안으로 뛰어들어가 도토리한테 헤드록을 걸 기세로 소리친다.

"여기, 여기 보세요. 도토리.”

"드디어 걸렸군, 이 좀마.”

"이봐. 봉다리 너무 성급하게 굴지마. 신중해야 돼.”

"예. 보스.”

"빳떼리. 일단 놈을 살살 구슬려. 딥따리 들이댔다가 도망가면 만사 도루묵이니까.”

"알겠습니다.”

놈한테 쪽지를 날린다.

- 안녕하시어요.

너무 정중한 어투다.

근데 놈이 대답이 없다. ㅡ.ㅡ;;

"이 씁새가 쪽지를 씹어.”

"빳떼리. 흥분하지 말라니까.”

"네. 보스”

다시 한번 말을 건넨다. 최대한도로 정중하게..

- 그동안 바쁘셨나봐요. 보이시질 않던데요. 시간 있으면 한수 어때요 ^^

내가 말해놓고도 닭살이 돋는다. 뒈질랜드 ㅡ.ㅡ*

무려 10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모니터에 집중된다.

침묵..말이 없다.

이런 우거지 썁세레이숑이..

불끈해서 한마디 하려는 순간

- 네.

아주 짧은 대답.

그 순간 사무실 안에 환호성이 터진다.

환호성과 함께 후끈 달아오르는 사무실 안.

보스의 지시에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빳떼리! 놈의 맘이 바뀌기 전에 빨리 오로에서 제일 좋은 방 하나 잡아! 여직원들은 빳떼리한테 커피 좀 타다주고..구라! 김구라 이놈은 어디 갔어.”

"홈푸러스에 갔는데요.”

"구라는 왜요?”

"왜긴 뭐가 왜야. 구라가 어시시트를 해줘야지.”

보스의 말에 발끈해진다.

"보스. 구라 없어도 이런 하수는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그런 놈이 8전 8패를 당해.”

"그때는 실수였다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만사 불여튼튼이야. 봉다리! 빨리 구라한테 연락해서 만사 집어치우고 근처 피시방으로 가서 이리 들어오라고 해!”

"넵!”

이런 떠그럴... 구라 그 좀마가 거들먹거리는 꼴을 또 어떻게 보나.

여기서 우리 영업3과 팀원의 바둑 실력을 살펴보자.나는 이미 말했듯이 오로 4급이고 우리의 보스 고릴라는 오로 공인 8급이다.

솔직히 우리 보스처럼 바둑이 안 느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기력이 무려 5년인데도 아직까지 8급이라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런데 바둑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바둑 광(狂)애기가이다.

봉다리. 보스 때문에 바둑을 배웠다. 기력 2년 만에 5급이다. 나하고 정선인데 무지막지한 전투바둑을 즐긴다. 대마를 죽이든가 대마를 잡든가 둘중에 하나다. 한마디로 무식하다.

김구라. 우리 영업3과에서 최고의 고수다. 현재 1급. 올해 안에 1단을 목표로하고 있다. 저놈이 1단으로 올라가는 걸 어떻게 두눈 뜨고 볼지 막막하다.

217번방.

오로에서 제공하는 아늑하고 쾌적한 방에 도토리와 난 자리를 잡았다.

이 얼마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순간인가. 오늘은 그야말로 도토리를 갈아서 묵사발을 만들어버리리라. 끓어오르는 복수심에 마음은 급하고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지만 혹시라도 놈이 변심을 할지 몰라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 한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놈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하여간 싸가지다.

마치 일전을 앞둔 투우처럼 시끈덕하는 순간 향긋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우리 막내가 커피를 타왔다. 내가 좋아하는 쵸이스다.

쵸이스 2스푼에 설탕 1스푼. 시나몬스틱으로 커피를 저어서 살짝 계피향을 첨가시켰다. 환상적인 맛이다. 하여간 예쁜것들은 뭐를 해도 이렇게 예쁘다. 어떻게 내 취향을 이렇게 잘 아는지... 막내하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구체화된다.

그건 그렇고 바둑은 기본시간 10분에 30초 3회다. 돌을 가리자 내가 흑번이다.

예감이 좋다.

커피를 한모금 음미하고 우상귀 화점에 힘차게 착점한다.

놈은 좌하귀에 소목이다.

"빳떼리, 최대한도로 시간을 끌어. 구라 그놈이 지금 피시방으로 열라 가는 중이니까 3분 안에 도착할 거야.”

보스가 그러든 말든 놈이 착점을 하자마자 착점을 한다. 구라 그놈이 오기전에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빳떼리, 천천히 두라니까.”

"이 좀마가 헤드록의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봉다리가 본능적으로 빳떼리에게 헤드록을 가하려는 순간 보스의 솥뚜껑 같은 손이 봉다리의 뒤통수를 갈긴다. 거의 눈이 튀어나올 뻔한 봉다리다.

"선수 사기 죽일 일 있어!! 시도때도 없이 헤드록이야! 헤드록은...”

깨소금이다. 작년에 먹은 송편이 쑥 내려간다. 그 통쾌함에 여직원들의 응원이 금상첨화를 이룬다.

"빳떼리님!! 화이팅!!”

"해도 떠도 빳떼리! 달이 떠도 빳떼리! 빳떼리 최최고!!”

아~~ 막내의 저 쭉 뻗은 몸매, 응원하는 목소리도 어쩜 저리 상큼할까.

그 옆에서 같이 응원하는 모난리자와는 정말 비교가 된다. 어쩔 수 없는 태생의 슬픔이여... T.T

바둑은 중반이 지나기도 전에 치열한 전투로 돌입한다. 중앙에 서로의 돌들이 끊겨서 죽기 살기로 치받는다. 딱 내 스타일이다.

그때 '딩동' 친구접속 시그널이 울린다.

                        침묵의남자

구라다. 언제 봐도 저놈의 대명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침묵의 남자라니... ㅡ.ㅡ*

구라가 우리방으로 들어온다.

- 안녕하시어요. 잠시 구경 좀 하겠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딱 떼는 저 멘트. 역시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그때 봉다리의 핸드폰이 울린다. 구라의 훈수통신이다.

구라의 훈수를 받은 봉다리가 중계를 한다.

"아이-5”

내가 두려는 곳이다.

"아이-6”

역시 내가 두려는 곳이다. 4급이나 1급이나 별다를 바가 없다. 제놈이 훈수를 한다고 한들 어차피 외길이다.

"이거 백이 죽는 거 아냐?”

8급인 보스가 봐도 안다. 백이 살길이 없다.

이제 도토린지 뭔지 이 씁새는 묵사발 되는 것만 남았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찢어지는 입을 감추지 못한다.

치밀어오는 기쁨의 전율이 온몸을 떨게 만든다.

오르가즘이 바로 이것인가..

그때 분수처럼 쏟아지는 아드레날린을 멈추게하는 한마디.

"엔-10”

봉다리의 중계다.

"엔-10이요?”

"그래. 엔-10”

한칸을 뛰는 수다. 갸우뚱. 이건 아닌데...


계시원의 얼음같은 초읽기가 시작된다.

하나..둘..셋..

"뭐해. 안두고. 엔-씹”

"빳데리! 빨리 둬!”

봉다리와 보스의 다그침이 계속된다.

"빳데리님...”

막내의 애절한 표정도 보인다. 어쩌면 그렇게 보인 건지도 모른다.


이건..아닌데... 라는 생각과 함께 엔-10에 착수를 한다.

따악...

착점의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봉다리의 외마디가 들린다.

"아냐?”

불길한 예감이 후두엽을 강타하면서 측두엽과 전두엽을 꿰뚫는다.

그 순간 놈의 백돌이 한칸 뛴 곳을 거침없이 끼운다.

이것이다. 이것 때문에 엠-10으로 늘려고 했는데 왜 엔-10인가.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봉다리쪽으로 옮겨간다.

봉다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핸드폰에 외쳐댔다.

"엔-10이 아니고 엠-10이라고...?”

뒈질랜드... 엠-10을 엔-10으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결국 흑은 또 다시 끊긴다. 수상전 불가. 살길이 없다.

빳떼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억누르는 화 때문에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보스.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 봉다리.

그리고 안타까움에 금방이라도 그 큰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막내.

얼굴이 벽돌처럼 굳어진 모난리자.

모니터 속에서 진짜 침묵의남자가 돼버린 구라.


"다시 둬.”

보스의 낮은 목소리가 최종선언을 한다.

그러나 다시 둘 기회도 없다.

불계를 누르고 재대국을 누르기도 전에 놈은 -잘두었습니다- 한마디를 도마뱀 꼬리처럼 남기고 사라진다.

다른 때 같으면 쌉쇼레이숑이니 뭐니 욕이 난무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다.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다. 말할 기운도 없다.

다른 사람들도 말이 없다.

우린 모두 패잔병이다. 패잔병이 무슨 말이 필요한가.

보스가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다.

"오늘 회식이다.”


그날 영업3과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안주는 물론 도토리였다.

도토리는 이제 명실상부한 우리 영업3과의 공동의 적이었다.

도토리 앞에서는 직분도 직책도 남자도 여자도 이념도 개념도 종교도 빈부도 적도 아군도 없었다. 

                      타도 도토리!!!

그때까지 빳떼리는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우연히 자신의 철천지 원수가 돼버린 도토리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은... (3편에 계속)  
         

1편부터 보기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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