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 쓴 돌바둑판 논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반도에 전해오는 18곳의 돌바둑판이 도교와 유교의 신선, 청담, 그리고 안빈낙도의 산물이라는 주제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릉 유천동의 돌바둑판을 떠올려 본다.

유천동 돌바둑판은 강릉시 외곽에 있다. 강릉은 동해의 고읍(古邑)으로 예로부터 사주산(四柱山)에 둘러싸인 명당지로 꼽혀 왔다. 강릉의 사주산은 원대산, 태장봉, 땅제봉, 모산봉으로 이 네 개의 산이 강릉을 기둥처럼 떠받친다는 의미가 있다.

유천동 돌바둑판은 강릉원주대학 정문에서 유천동 방향으로 직진하다 보면 유천동버스 종점이 나오는데 그곳에 땅재길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정면으로 낮으나 웅장한 봉우리가 보이는 데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한다. 유천동 돌바둑판을 보면 도교 유교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유천동 돌바둑판 앞에는 당산(堂山)이 있고 좌우에 거대한 남근바위와 여근바위가 있다. 당산신을 모신 도당(禱堂)은 우리 민속의 고유 신앙이다.

유천동 사람들은 해마다 이 당산에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 몇년전 유천동 돌바둑판을 탐사했을 때 제문은 구할 수 없었다. 하여 민속자료집에 있는 1937년 경기도 의왕리 도당제문으로 유천동 제문을 유추해 본다.


- 산아래 유학 이승면 등이 목욕재개하고 삼가  희생과 예물을 갖추어 병산의 산신령께 고합니다. 밝고 밝은 산신께서 이 동리를 눌러 은밀하게 도움을 주시니 물건 하나 잃는 일 없이 주민 가가호호 모두 칭송을 드립니다. 신과 인간이 서로 마룻대처럼 의지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오래도록 그 해택을 받으니 시원한 바람을 맞는 듯합니다. 흠양 하소서.


당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산신령(당산할머니, 할아버지)을 모셔 공동체의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빌던 토템이다. 음력 정월보름이나 시월보름에 행하는 경우가 많다. 제의는 유교적 제의와 무녀(巫女)를 동원한 굿거리까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천동 당산의 특징은 당산앞의 돌바둑판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 옆에 거대한 자연석 남근바위와 여근바위가 있는 점이다. 돌바둑판은 자연석 암반 위에 양각으로 새긴 것으로 필자가 본 돌바둑판 중 으뜸이다.



전국의 돌바둑판이 있는 곳에는 바둑담이 한두 개씩 전해 온다. 유천동 부근에도 바둑두는 신선담이 존재한다. 내용은 지극히 희미하여 재현 불가다. 하여 지리산 곡성에 전하는 최치원의 바둑담을 언급한다.

최치원 생존 시대로부터 장장 600년 후. 조선조 중종 때, 전라도 곡성 서계 땅에 남추(南趎)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인물이 준수했고 재주가 비상하여 모든 학문을 배우지 않고도 통달했다.

남추는 중종21년(서기1526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당시 실력자였던  남곤(기묘사화를 일으킨 인물)의  미움을 받아 출세를 포기하고 28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에 내려와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삼아 지내며  선도 수련법을 공부하여 스스로 호를 선은(仙隱)이라 칭했다.

어느해 가을 남추는 자기집 하인에게 편지 한 통을 써 주면서 “너는 이 서찰을 갖고 당장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가거라. 거기에 가면 노인 두 분이 바둑을 두고 있을 것이니 곡성 서계에서 왔다고  말하고 이 서찰을 전한 다음 반드시 회답을 받아오거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하인이 주인의 분부대로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갔더니 과연 산자수려한 골짜기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있고 도인과 노승이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인이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절한 뒤 “소인은 곡성 서계에 사는 남진사댁 하인이온데 진사께서 이 서찰을 주시면서 꼭 답장을 받아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며 편지를 올리자 도인이 웃으면서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노라.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는 두던 바둑을 끝낸 뒤 답장과 함께 청옥(靑玉: 푸른색 옥) 바둑돌 한 벌을 내주는 것이었다.

하인이 집에 오니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이 이야기는 17세기 사람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에 전해오는 것으로 '술이기'에 전하는 '난가'고사의 아류다.

(위)태안의 태을동천 암각바둑판. (아래)횡성의 취석바둑판.

유천동 돌바둑판은 유불선 그리고 우리의 토템이 집약된 특이한 사례다. 도교를 구현한 태안의 태을암 돌바둑판이나 유교를 표방한 횡성의 취석 바둑판과 함께 토템을 습합시킨 사례라 하겠다.
유천동 돌바둑판은 천원점의 문양과 실재의 바둑판과 가장 비슷한 크기의 돌바둑판이다. 실전대국이 가능할 정도다. 제작연대는 19세기 말로 추정된다.

사실 국내의 돌바둑판의 연대는 그렇게 길지 않다. 거의가 조선후기의 것으로 파악되고 몇 곳 정도가 조선중기로 추정되나 그나마 확실한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학계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으니 지금부터 그 돌바둑판 하나 하나를 묻고 따져야 한다. 그래야만 유의미(有意味)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