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현기경은 바둑책이면서도 그 속에는 동양사의 굵은 뼈대를 농축시킨 명저다. 묘수풀이 하나 하나에 동양문화의 어떤 의미들이 녹아 있는 역저로 최초의 필자들이 들인 엄청난 노고가 놀랍다. 사례 하나를 들어 보자. '명주출해세'가 있다. 명주출해세는 '백호통의'가 출처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河出龍圖洛出龜書江出大貝海出明珠德八方則祥風至~]

현현기경은 우주의 탄생과 문화의 시작을 바둑의 수로 묻고 답한다. 하도와 낙서의 출현을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어떤 메시지로 이해하려 한 동양 식자들의 지향점에서 바둑수를 생각한 현현기경의 필자들이 경이롭다. 명주출해세가 백호통의에 전고를 대고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백호통의의 편찬자가 '반고' 그 사람, '바둑론'의 필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본에도 한국의 역사유물들이 많다. 이 속에 바둑유물들이 있다. 동경국립박물관 소장품에 '이여송기반'이 있다. 바둑판 뒷면에 쓰여진 '기반명'을 보고 조선의 바둑판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바둑판 옆면에 용과 봉황을 자개로 장식해 넣은 명품이다. 기반명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만력20년 7월 명나라 황친이 이여송에게 기반장 송술양의 바둑판을 선물했다.]

민력20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다. 이여송은 이 해 조선에 온 것도 맞다. 그러나 7월 이여송은 북경에 있었다. 이여송은 같은 해 12월 말경 의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이여송기반이 조선의 바둑판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일본의 바둑 자료.


일본에는 조선의 바둑판으로 판단되는 기반이 대여섯 점 더 있다. 그중에 '기보'도 한 편 있다. 기보는 현현기경류의 책이지만 여백 곳곳에 필사자 나름의 바둑론과 바둑담이 녹아 있어 자료의 가치가 있다. 끝장에는 그림 한장이 붙어 있는데 필사자와 친구들의 야유회 모습인 듯하다. 화제에 바둑두고 술 마시고 시를 짓다는 내용도 보인다. 연대도 특정할 수 있다. 소장자에게  복사를 허락받지 못해 사진 몇 장 찍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한번 더 복사 허락을 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앞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필자 자신의 다짐이 있기에 멈출 수 있었다. 멈춰야 했다. 한걸음 더 나간다면 이것은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다. 필자는 바둑사를 탐하며 한-일 두 나라에서 두 사람의 바둑마니아의 신세를 졌다. 부산의 김수명 님과 오사카의 겐타로 님이다. 김수명 님과는 58일간 남한의 역사유적지를 탐사했고 겐타로 님에게는 두 차례 일본 탐사 신세를 졌다.

태백산에서 부산의 이수명 님과 역사탐방을 끝내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필자는 그 분에게 약조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못 지켰다.


헛소리를 모두 깨트리자 약조했건만
흐르는 강에 엽서를 쓰고 그 마음 접었네
(割破杜撰信念約. 流江傳書欲絶情)


맹자에 역사를 다 믿는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盡信書 其不如無書). 책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겠다.

이론과 실재는 어느 정도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이론으로 실재를 재단할 수 없듯 실재로 이론을 꿰어 맞출 수도 없다. 공부는  언제나 살아 있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