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역사의 모퉁이
2.  기다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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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역사의 모퉁이

정조19년 1794년 계해년 3월10일 창경궁 후원에서는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정조실록은 이날 행사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전한다.

천향각 앞에 자리를 펴고 부용정 앞 연못에서 낚시대회를 열었다. 상(임금)이 4마리를 잡고  신하들 중에는 잡은 사람과 못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마리를 낚을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잡은 고기는 놓아 주었다. 밤늣게 자리를 파했다.

(莩蓉亭小樓臨太液池重釣 諸臣還池投罕 上釣獲四魚 諸臣諸生有獲有不獲 每一得魚경陳樂日曲 旣又放生于池中夜乃罷)


실록의 간단한 이 기록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정조가 재위19년에 접어들면서 나름의 완숙한 정치를 펼치며 춘삼월 봄날에 궁안 연못가에 신하들을 초청하여 낚시대회를 열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부용정은 한양 궁궐 안에서 가장 큰 연못으로 붕어 잉어 자라 등의 어류가 살고 있어 낚시를 하기에도 적당한 자리였던 모양이다. 정조는 이날 낚시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정조 혼자서 4마리를 낚는 동안 신하들 태반은 손맛 한번 보지 못하고 있다.

고기 한마리를 낚을때마다 장악원의 악단의 연주가 있고 상으로 술 한잔이 내려진다. 또한 잡은 고기는 놓아 주는 것이 법이다. 오늘날의 프로 낚시법과 다르지 않다. 이날 행사의  스케치는 더이상 없지만 시문집이 남아 분석하기에 따라 이날의 생생한 복원이 가능하다.  이 시대의 자료인 [내원상갱재축]은 이날 40명의 각신들이 모였다 한다. 낚시를 하는 도중 정조는 신하들에게 집필묵을 나눠주고 시 한수씩을 적어 내게 한다. 손수 시제를 냈는데 다음이다.

내원에서 낚시대회를 여니

앞 연못에 어진 사람들이 있도다.

(內苑詞魚藻. 前池有鳳毛)


'봉모' 는 귀족의 자식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날 모임에 각신들의 자식들도 함께 부른 것으로 보인다. 모임의 성격이 정조 측근들의 단합대회임을 알 수 있다. 참석자들의 면모는 이병모, 김원행, 서유구, 김조순, 정동준 등 그야말로 정조의 측근 중의 측근들이다. 참석자들 모두가 시제에 화답을 하는데 서영보(徐榮輔 1759-1816)의 화답이 돋보인다.


말 위에서 글짓는 재주도 자랑은 아니지만

물고기 보는 것은 호(장자에 나오는 물고기 논쟁)보다 낫다오.

(騎馬才慙漢. 觀魚樂勝濠)


서영보는 정조시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영보는 김조순 정약용 등과 비슷한 연배로 정조의 무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다. 서영보는 정조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1790년 북경 사신단의 서장관을 거쳐 황해도 암행어사, 승지,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황해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김조순이나 정약용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출사길을  거친다. 이날 연회에 참석했던 서영보와 김조순의 후기가 있다.(다음편  자료 1, 2참조)

임금을 모신 좋은 자리에 꽃피고 잔치는 즐겁다. 임금과 신하 정답게 모여 천년전부터 지금껏 선인들을 생각하니 아, 이 모임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도다.


서영보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고 이날의 행사는 끝났지만 꼭 끝난 것도 아니다. 이날의 행사가 이것으로 끝났다면 필자는 글로 채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조는  행사가 끝난 밤에 서영보를 따로 다른 곳으로 불러 바둑을 두게 한다.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다음편에 계속)

(정조임금의 바둑 시. 출처  홍제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