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남명학이 뜨고 있다. 이이, 이황 등 조선의 성리학 거두들의 그림자에 가려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주목받는 이유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의 덕목 때문이다. 선생의 생활 거점이었던 산청(山淸)에는 선생의 묘지는 물론 서재였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은거지를 정하고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만든 작은 서당으로 훗날 정조임금의 지음으로 퇴락한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곳이다.

산천재 편액 위에는 벽화 몇점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상산사호도' 다. 상산사호도는 널리 알려진 것이어서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상산사호도는 정선, 김홍도, 이인문 등 조선의 절대 화원들이 즐겨 그린 화제(畵題)기도 하다.

상산사호도가 남명 조식 선생의 유허지에  건립된 건물에 그려진 것은 은둔자의 덕목을 구현한 선생의 이력에 잘 부합한다. 이 벽화는 산천재의 퇴락과 함께 불과 몇년전(2006까지)에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물론 벽화에 대한 학문적 검토나 보존 방안의 연구 등은 없었다. 작년에야 벽화에 대한 검토논문 한편이 나왔을 뿐이다. 논문의 내용도 별다른 게 아니다. 남명의 은거가 상산사호와 이윤(伊尹)설화에 부합한다'는 정도의 지극히 원론적인 것이었다.

남명학은 남명 조식선생과 바둑의 접점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선생 생존시에 바둑을 가까이 했다는 기록을 한줄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선생의 직접 유훈기록은 한줌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선생의 바둑은 아주 크고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선생의 제자 태반이 의병장들이었고 그들의 선봉이었던 '곽재우'는 군왕 선조까지 알고 있던 바둑마니아였다.  


선조는 조선의 군왕들 중 바둑을 가장 좋아한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선조는 곧잘 국사를 바둑과 연관지어 말하곤 했다. 인조임금과 곽재우와의 대담에도 바둑이 등장한다. 선조는 곽재우를 평하며 군대를 움직이고 전개하는 것 중 (바둑의) 포치(布置)가 능한 사람이다,고 했다.

곽재우는 초야에서 이름없이 살다가 불식간에 임진왜란을 맞아 고향인 경상도에서 의병을 모아 질풍노도로 진격하는 일본군의 후방을 유격전으로 교란하여 일본군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전라도 방면의 전개를 막아내는 큰 전공을 세운다. 곽재우는 초야에서 시문과 활쏘기 그리고 바둑으로 소일하며 살던 한촌필부다. 그런 사람이 국가위기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것도 아름답지만 병법에도 밝아 전공까지 세우며 선비의 도를 다한 것은 멋지다.

곽재우는 전문적으로 습득하지 못한 병법을 바둑론으로 대체하는 임기응변을 보여준다. 곽재우가 바둑을 병법으로 이해하고 활용한 장면이 여러 곳에 보인다.

- 국가의 성패는 바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진 바둑도 한번쯤은 이길 수 있었던 형세가 없지 않을 것이며 이긴 판이라도 질 수 있는 형세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나라의 형세가 패한 바둑판의 모양이기는 하나 (잘 살펴보면) 어찌 이길만한 수가 없겠나이까?

평상시의 수로는 오늘의 위급한 국가형세를 구하지 못합니다. 보통이 아닌 고단수(은혜와 위력)로 붕당을 제거하고 탐관오리들을 타파한 후에야 모든 신하들과 나라의 일을 의논할 수 있을 겁니다. 이후로는 남쪽의 일본도 북쪽의 여진도 근심할 일이 없다고 봅니다.(선조실록)

이 기록은 대제학 '권유'가 지은 곽재우의 신도비에 있는 기록이다. 광해군일기에도 들어 있다. 곽재우는 전란이 한창인 선조임금에게 급박한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

산천재를 찾아가는 도중의 '안의'에서 본 옛날 서당.

바둑을 잘두는 사람은 진 판을 바꾸어 이긴 판으로 만들고 바둑을 잘 못두는 사람은 이긴 판을 타고 앉아서 진 판을 만듭니다. 하여 나라의 형편이 이미 기운 바둑판의 모양이지만 어찌 이길 수 있는 한수가 없겠나이까. 곽재우는 이 글을 남기고 난이 끝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끝내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거한다.

선생의 학맥의 거봉인 정구, 이산해, 하홍도, 하달홍 등이 끝없이 바둑담을 생산한 것으로 보아 남명학이 바둑을 터브시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지난주 토요일 경상남도 거창에 있는 금원산의 한 암자를 찾았다. 불화와 사경(寫經)을 하는 금어승을 뵙고 하룻밤 유숙하고 다음날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를 찾았다. 산천재는 새롭게 채색을 입힌 벽화로 필자를 맞았다. 사진에 담으면서 생각이 많았다. 남명학이 뜨고 산천재가 관광지가 되면서 퇴색한 벽화를 채색한 것이겠으나 고증은 한 것인지 원 화원(畵員)은 특정은 한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이 벽화는 완고한 유학의 범주로 보면  아주 드문 경우다. 바둑벽화로는 필자가 알기로 제주도 관덕정 '사호도'와 더불어 국내 최고다. 건물 중수기에 따르면 17세기 초기까지 올라갈 정도의 유물이다. 이런 문화적 유산을 너무도 소홀히 한 것 같아 아쉽다. 수백억의 예산을 들여 기념관을 짓고 남명학 학술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잘한 일이나 이런 점은 과오(?)겠다.

그러나 이런 과오 속에 남명 조식선생이 조선 유학의 거봉임은 분명하고 그의 학단에서 존중받았던 바둑을 엿본 것은 큰 소득이라 하겠다. 산청에서 올라온 지 이틀밤을 심한 몸살로 뒤척였다.